(4)인간회복을 위한 캠페인|바다의 길잡이 등대지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선박들의 항로를 멀리 비추어주고 길잡이 노릇을 하는 것을 나의 천직으로 알고 일해 왔을 뿐입니다.』
백야도 등대장 김영한씨(53)는 겸손하게 말했다. 전남여천군화정면, 크고 작은 섬들이 1백여개나 옹기종기 모여 해안의 굴곡이 심한 곳에 도시의 고·스톱처럼 우뚝 서있는 등대. 이곳은 김씨가 34년동안 몸담아 일해온 등대라 했다. 김씨가 등대에 첫발을 들여놓은 것은 19세때. 고향인 경남창원에서 가덕도 등대요원으로 일하기 시작한 것이 처음이었다.
배의 길잡이를 유일한 보람삼아 이때까지 살아온 반생이었다.
그가 잊을 수 없는 보람으로 남아있는것은 9·28수복때 인천팔미도등대에서 일할 때였다고 말한다. 하루아침에 인천앞바다는 느닷없이 수많은 함정으로 가득 찼다는 것.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하기위해 1천여척의 대소함선을 동원했던 것이다.
이때 김씨는 단신으로 팔미도에 상륙, 불만 켜진채 회전이 안되는 등명기를 자기손으로 20여일동안이나 계속 돌려 어두운 밤바다의 뱃길을 안내했었다고. 각 등대마다 섬광의 회전수가 달라 25초에 1섬광의 팔미도 등대의 회전수에 맞추어 동명기를 돌리다 보니 손이 부르터서 솜뭉치를 손바닥에감고 돌렸는데 인천 앞바다에 함정이 좌초하거나 함정끼리의 충돌사고등을 막도록 불을 밝힌 것은 일생에 가장 큰 보람이었다고 김씨는 회상했다.
이제 등대장으로 승진한 김영한씨는 34년의 긴 경력의 소유자임에도 저녁 어스름이 바다에 깔려 등탑에 불을 켜는 시간만은 기도드리는 마음으로 붙을 켜놓고도 규정된 회전수를 맞추기위해 스톱워치를 들고 하룻밤에도 몇번씩이나 시간을 재어보고 있었다. 이같이 무인도에서 오직 풍랑을 만났거나 캄캄한 밤에 길잃은 각종 선박에 불을 밝혀주어 선원과 승객들의 목숨을 건지려고 안간힘을 쓰는 등대장은 전국에 44명, 전국에는 44개의 유인등대가 있으며 1백44개의 무인등대가 있어 뱃길을 밝혀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등대수는 모두 1백85명(이중 임시직 166명). 이들은 1등급에서 5등급까지 나누어져 있는데 1등급의 대우가 공무원의 4급갑으로 되어있다. 김씨같은 등대장의 경우(l등급) 1만8천여원의 본봉과 1천8백원의 수당을 받아 살림은 어렵게 마련.
김씨는 지나온 34년동안 20여척의 난파선원을 자기의 목숨을 걸어 구조해 주었다고 했다. 김씨에 의해 구조된 선원들은 목숨을 전져 돌아가 버린후엔 소식한장 보내주지않아 몹시 섭섭했다고.
그러나 전국 등대장중 가장 고참인 그도 작년 9월29일은 악몽의 날로 기억하고 있다. 태풍 빌리호가 남해안을 휩쓸었던 그때 덴마크제 발전기가 그만 고장이 났던 것. 폭풍에 성난 파도의 포효속에 그는 아무리 시동을 걸었으나 발동이 걸리지 않았다. 가까스로 발전기를 고쳐 놓았을 때는 점등 2분전.
20초에 1섬광 광달거리 18·5마일의 백야도등대가 1만4천 촉광의 불빛을 발했을 때에 풍속에 휩쓸린 어선등 선박이 등대불을 바라보며 삶을 헤칠 것을 생각하며 그만 등탑을 안고 기쁨에 잠겼다고 했다.
정년을 7년남긴 김씨는 그동안 4차례 새부인을 맞았으나 지금은 홀아비. 고독에 지치다 못한 부인은 끝내 그에게 한자소식도 남겨주지않고 도망가 버리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죽기보다도 두려웠던 고독이 이젠 차라리 익숙해졌고 등대와 파도를 반려자삼아 항로의 길잡이라는 사명감에 항상 경건한 마음으로 점등에 임합니다』고 김씨는 말하며 『등대수의 어린이들의 교육에 당국의 배려가 있어주었으면』하고 바라고 있었다. <여수=황영철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