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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25 20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낙동강 공방전(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동부전선>(1)
낙동강교두보의 최우단거점인 동해안 영덕에서는 북괴군이 8월 충공세를 전개하기 전에도 7월 중순이래 북괴 제5사단과 한국군 제3사단간에 일진일퇴의 혈전이 거듭되고 있었다. 한국군이 주역인 이 지역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가는 본회에 등장하는 참전증인의 입을 통해서 직접 들을 수 있다.
몇가지 기록을 보면, 미8군사에서는 영덕공방전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주로 지형상의 이유로 이 방면 전세를 별로 염려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즉 대구시 동북으로부터 영덕으로 이르는 80km의 동부전선은 준엄한 산악지대로서 남북으로 통하는 자동차길은 동해안 도로와 안동∼의성∼영천 도로위 두길 밖에 없다.

<미8군선 동부전상 낙관>
미8군사에서는 이 두 도로만 제압해 놓으면, 위력있는 적부대도 침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국군 제8사·수도사는 도로교차점인 의성을 중심으로 방어하고, 제3사단은 영덕을 지키고 있었다.
이에비해 북괴군 제2집단 군단장 김무정중장은 북괴군 제8사로 의성을, 그리고 제5사로 영덕을 공격케하는 동시, 제12사를 태백산중으로 참진시켜 단숨에 포항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또한 이와는 별도로 제766유격연대를 울진으로부터 남침시켜 안강리동쪽의 형산강교와 대구남방의 저도터널(길이1천5백m)의 파괴도 명령했다. 이것은 대규모의 후방교란작전의 일부로 계획된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하에 동부전선에서는 북괴군의 8월 총공세를 맞아 피아간에 처절한 격돌이 재연되었다.
8월5일, 타전선과 연결하여 총공격을 재개한 북괴군 제5사단은 앞서도 말한바와 같이 7월중순이래 수차 주인이 바뀌었지만 8월4일까지는 국군제3사단이 확보하고 있던 영덕을 휩쓸고 남침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동부전선도 다른 전선 못지않게 위험을 고하게 되었다.
그럼 8월5일의 북괴군 8월공세가 시작되기전의 영덕공방전을 국군제3사단의 한 참전장교로부터 들어보겠다.
▲공국진씨(당시3사단참모장=중령·전헌병사령관·예비역준장·현양도산업사장·49)
『7월19전에 영덕을 적에게 처음 빼앗겼어요. 공식기록으로는 영덕을 네번 빼앗고 빼앗긴 것으로 돼있지만 실제로는 밀고 당기고 한 것이 몇번인지 기억도 못할 만큼 여러번이예요. 시체를 치울틈도 없어 피아시체가 산하에 즐비했으니까요. 특히 영덕북방의 308고지 쟁탈전이 심했지요.
그때 3사단은 한수이남에서 건제를 갖춘 유일한 국군사단이 었지만 1개연대는 착출당하고 제22, 제23의 2개 연대만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강원도와 경기도에서 피난온 경찰 8백여명(지휘관 손계천총경)을 예비대로 쓰면서 전투를 했읍니다.

<새우젓독같은 함포탄사격>
우리 사단전면의 적은 1개사단반가량의 병력인데 화력이 대단히 우세해요. 그래서 적의 공격을 받으면 우리가 밀려서 영덕이나 고지도 빼앗겼지만 미해공군의 엄호로 우리가 반격, 다시 탈환하곤 했지요. 이때 미주리전함을 비롯한 4, 5척의 미영순양함과 구축함등이 함포로 지원해 주었습니다. 보통 8인치 함포로 쏘아대는데 때로는 미주리전함의 16인치 주포도 씁니다. 새우젓통만한 포탄이 떨어지면 직경 10m이상의 큰 웅덩이가 푹 패어요. 우리가 함포의 덕을 크게 입긴 했어요. 적의 집결지나 갓 점령한 점호에 함포가 작렬하면, 적들은 간담이 떨어지고 국군은 사기가 올라 반격을 하게 마련이죠. 그러나 함포는 야야포같은 명중효과는 아주 적어요. 이유는 정찰기가 관측을 해 통보해주면 쓰는데 지해공의 삼각관측이 잘 안되기 때문이죠.
국군에 함포를 정확히 유도할만한 통신 및 관측설비가 없는 것도 그 이유중의 하나구요. 지상에서도 미군이 4문의 1백55mm 자주포를 몰고나와 우리를 지원했지요. 이래서 열로한 병력으로도 고전을 하면서 영덕∼포항사이의 지역에서 버티었지요. 이 지역방어가 무너지면 대구가 직접 위협을 받을 뿐만 아니라 부산항이 비좁아 일부 외국원조병력과 물자가 포항으로 오는데 그것을 양륙못하게 되지요. 또 포항근처의 오천비행장도 사용못하게 되구요.

<열차서 ml 조작신병 훈련>
우리가 영덕·강구지역에서 고전을 겪을때 탄약과 식량은 물론이고 신병보충도 한때 끊어졌어요. 신병이라야 가두에서 붙잡아 군복으로 갈아 입히고 기차태워 데리고 온 사람들이예요. 기차안에서 M1총을 창밖으로 내대고 장탄과 격발법을 교육받은 정도지요. 이들을 전선에 투입하고서 망원경으로 보면 비행기나 함포의 지원이 있으면 몇발짝씩 나가다가 지원이 끊어지면 우루루 밀리는 것이 빤히 보입디다.
나중에는 그나마 신병보충이 끊어져 주민이나 또는 피란민중에서 40∼50세까지의 장년들을 데려다가 장탄과 격발법을 가르쳐 전투를 시켰어요. 적들도 8월초순이 되니까 사정은 우리와 비숫해집디다. 병력의 절반이상이 남한출신의 의용군으로서 우리네 신병과 다를게 없어요. 그들도 공습으로 보급이 잘 안되는지, 3일정도 공격해오다가 하루이틀 쉬는 식으로 반복합디다. 그것은 한번 보급을 받으면 3일밖에는 지탱할 수 없다는 증거이지요.』
한편 기록을 보면 영덕남방의 181고지 공방전을 둘러싸고 2건의 즉결처분과 교량의 조기폭파등의 사건으로 2명의 연대장이 해임되고 결국은 사단장까지도 책임을 지게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런 문책은 제3사단의 미고문 롤린즈·S·에메리치중령의 강경한 건의로 이루어졌지만, 영덕공방전이 얼마나 치열했는가의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먼저 제3사단 제23연대장 김종원중령(고인)의 해임경위부터 살펴보면, 7월24일에 아군은 적의 중압으로, 영덕을 버리고 남쪽 강구로 후퇴했다. 적은 계속 진격, 강구를 제압할 수 있는 181고지를 점령했는데 사단장은 23연대를 시켜 탈환을 명령했다. 25일에 23연대는 이 고지를 일단 탈환했으나 적 반격으로 다시 상실했다. 사단장은 이번에는 22연대(연대장 강태민중령)를 시켜 이 고지를 수류탄 공격끝에 겨우 탈환했다.

<부하 처형한 연대장 해임>
23연대장 김종원중령은 자기연대가 181고지를 적에 빼앗기고 탈환공격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소대장을 즉결처분하고 사병 1명을 총살했다.
미군고문은 이런 김중령 처사를 못마땅히 여기고 상부에 건의하여 그를 해임케 했다. 원래 김종원중령은 6·25전에도 미고문관 구타사건으로 군을 떠나 경찰에 투신했다가 적남침후 다시 군에 복귀한 후에도 미고문과의 사이에는 좋지 않았었다.
8월5일 적의 총공세가 시작된후 앞서의 김종원연대장 해임의 원인이 된 181고지 공방전에서 이번에는 사단장 자신이 물러나는 사태가 발생했다.
181고지와 국군 제3사단과는 묘한 악연이 있었다고 하겠다. 8월5일에 3사단이 적5사단의 포위공격을 받고 영덕남방으로 후퇴하자 워커 8군사령관은 미고문 에메리치중령에게 원진지를 회복하라고 명령했다.
6일에 3사단22연대는 폭격과 함포의 준비공격끝에 공격을 개시하여 혈전끝에 이날밤 이 고지를 탈환했다. 제22연대가 181고지에 대해 야간공격을 감행하고 있을때 사단전방 지휘소에는 적의 포탄이 낙하하여 수명의 사병들이 전사했다. 포탄이 맹렬히 낙하하니까 사단장이하 참모들은 부근의 산재된 개인호속으로 들어갔는데 이때 사단미고문관이 연락병을 지휘소에 보냈던바 아무도 없었다.

<김석원장군 3사단장에>
이 소식을 듣고 에메리치중령이 직접가서 지휘소 부근의 호속에서 이준식사단장(고인)을 만나고 빨리 참모를 집합, 지휘소 기능을 회복하라고 말했다. 에메리치중령은 사단장이 적포격을 피해 잠시 호속으로 대피한 것을 못마땅히 여기고 워커사령관에게 3사단장의 교체를 건의했다. 워커는 이 건의에 따라 한국군 당국에 사단장 경질을 요청하여 신성모국방장관은 수도사단장직에서 물러났던 김석원준장을 7일자로 3사단장에 임명하게 되었다.
한편 181고지 공방전은 끝내는 22연대장도 희생케했다. 앞서 말한대로 6일 야간공격으로 22연대가 181고지를 탈환했지만 적은 8일밤에 이 고지에 견제공격을 가하는 한편 주력은 강구쪽으로 우회남하하는 바람에 아군은 분산되었다. 제2대대장의 부상으로 김상균중위가 대대를 지휘하여 강구북쪽의 150고지를 확보하려고 했으나 각 중대가 분산하여 강구쪽으로 후퇴하므로 김중위도 강구로 빠져 나왔다. 강구의 삼거리에서는 헌병들이 후퇴하는 병력에 말에다 흰수건으로 표지를 두르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적추격으로 조기폭파설>
이리하여 철수하는 장병들은 모두 흰완장을 하고서 강구의 오십천교량을 건넜는데 다리 남쪽에는 연대장 강태민중령이 헌병을 지휘하여 완장표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상균중위나 제2대대 장병들에게는 철수명령이 없었기 때문에 완장표지의 지시도 받지못했었다. 제5중대장 백모중위는 다리를 건너자마자 연대장에게 완장표지가 없다고 현장에서 총살을 당했다. 김중위는 완장표지도 하지 않았으나 다리를 넘어서자 마자 다리가 폭파되었다. 이때 시간이 8월9일 상오 5시였다.
이 오십천교는 극히 중요한 다리여서 미고문 브리튼소령 책임하에만 폭파하게 돼 있었으나 22연대장 강태민중령은 그의 제2대대 병력이 철수도 하지 않았는데 조기에 폭파함으로써 3백50명이상이 북안에 갇혀 이들은 헤엄쳐 도강하다가 상당수가 익사했다.
이런 연대장의 과오로 1개 대대의 장비와 병력은 막심한 피해를 보았다. 이 책임으로 강태민중령(l960년소장·병사)은 11연대장직에서 해임됐다.
한강교·안동교에 이어 오십천교는 세번째의 조기폭파이지만, 오십천교의 경우는 적이 꼬리를 몰고 추격하기 때문에 그 시기에 폭파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일부에서는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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