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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앎 만나는 인문학으로 연구자 생활 안전망 만든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5일 ‘인문학 협동조합’의 주요 협업단체인 ‘푸른역사아카데미’의 서울 종로구 사무실에서 임태훈 교수를 만났다. 조용철 기자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지난달 31일 오후 2시 서울 동숭동 ‘책읽는사회문화재단’ 2층 세미나실. 20대 중반부터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40여 명이 모여들었다. 교수·시간강사·대학원생·출판업자·문화기획자·예술인 등이었다. 이들은 이런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인문학은 삶과 앎, 노동을 만나게 하는 힘입니다. 인문학협동조합은 공부와 삶의 불일치를 협동적 활동으로 극복하고, 시민들과 인문학의 공유를 통해 서로의 삶에 보탬이 되게 하며, 인문학자와 인문학 공간들의 네트워크가 되고 싶습니다…. 연구노동자들의 일도 정당한 대가를 인정받아야 합니다. 이를 위한 새롭고 유력한 도구가 협동조합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속 가능한 경제활동을 창출·기획하고 대학의 연구노동 실태를 개선하는 데 노력하겠습니다.”

‘인문학협동조합’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20여 명의 조합원은 최소 1계좌에 10만원씩, 1500만원의 초기 출자금을 조성했다. ‘정당한 대가’를 받는 강연·사업을 기획하기 위한 자금이다.

이들은 ‘새로운 인문학’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키워드로 읽는 인문학’이란 주제로 ‘돈’ ‘노동’ ‘연애’ ‘땅’ 등을 연구 중이다. 10월엔 ‘오덕(오타쿠·매니어) 인문학’, 11월엔 ‘연애 in 문학’ 강의도 열 예정이다. 기차 종류를 다 외우는 철도 매니어, 애니메이션·추리소설 매니어의 세계를 인문학으로 풀 생각이다. 공연과 전시를 결합하거나 인문학 웹진 ‘앎 스트롱(strong)’과 팟캐스트도 만들기로 했다.

내년 3월엔 ‘지식팔레트 2014’를 연다. ‘지식팔레트’는 학제(學制)에 구속받지 않는 배움의 다양한 지평을 상징한다. 올해 안에 다양한 강좌를 시도해 보고, 그중 재기발랄하고 기상천외한 강의 중 ‘베스트 오브 베스트’를 정해 열흘 넘게 서울 곳곳에서 들을 수 있게 하자는 구상이다. ‘프리 패스(free pass) 팔찌’를 하고 다니면 어느 강의실에든 갈 수 있다. 사업 수익금은 사회안전망이 없는 조합원들을 위한 상호 부조와 복지에 쓸 작정이다.

인문학의 새바람을 이끌고 있는 이는 성공회대 임태훈(34) 교양학부 외래교수다. 지난 2월 지도교수인 성균관대 천정환(국문학) 교수와 대화를 나누다 인문학협동조합을 처음 구상했다. 창립선언문 초안을 썼고, 발기인 대표를 거쳐 미디어기획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를 25일 인문학협동조합의 주요 협업단체인 ‘푸른역사아카데미’의 서울 종로구 사무실에서 만났다.

“백화점 인문학은 안 할 것”
그에게 “정말 인문학에도 협동조합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그는 “젊은 연구자들이 연구와 강의를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답했다.

“학교마다 다르지만 비정규직 강사 같은 ‘불안정 연구노동자’들은 시간당 강의료로 4만∼5만원을 받아요. 시간당 3만원인 곳도 있고요. ‘88만원 세대’라는 단어가 있지만 월소득 88만원에도 못 미치는 사람이 많아요. 방학 때는 강의 수입이 없고 6개월마다 고용 불안에 시달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년 1월 ‘강사법’(고등교육법 개정안) 시행을 앞두고 일부 대학이 극소수 강사에게 강의를 몰아주고 있어요.”

그가 언급한 ‘강사법’은 주당 9시간 이상 강의하는 시간강사를 대학 교원으로 인정하고 4대 보험 혜택을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비용 부담이 늘어나다 보니 대학들이 오히려 강사 수를 줄이고 있다는 것이다.

“한 명의 학자가 탄생하려면 학부와 대학원을 거쳐 긴 세월이 필요한데 정상적인 생활조차 불가능하니 누가 공부하려 할까요. 연구노동자의 재생산시스템이 붕괴될 수 있는 겁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문학협동조합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협동조합 창립총회는 논의를 시작한 지 반년 만에 열렸다. 그는 “대학 바깥에서 지속 가능한 수익모델을 만들고 인문학 연구환경의 실태를 조사해 정책으로도 연결시키겠다”고 했다.

하지만 임 교수의 이런 위기의식은 최근 불고 있는 ‘인문학 붐’을 생각하면 의외로 보일 수도 있다. 유명 최고경영자(CEO)들이 인문학 강좌에 열광하고, 백화점 문화센터에서도 인문학 강좌가 인기를 끌고 있어서다. 하지만 그는 “그런 인문학은 우리가 하려는 게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백화점 인문학은 유명 강사의 이름값에 의지해 비슷한 레퍼토리를 반복하는 고전 읽기 강좌가 많습니다. 또 채용 면접 때 인문학적 소양을 물어보는 회사가 늘면서 단기 속성으로 필요한 교양을 가르쳐 주는 전문 학원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인문학은 경쟁의 도구가 아닙니다. 생활에 밀착하되 지금까지 없었던 주제·소재·형식을 발굴하고 싶습니다.”

그는 그런 예로 ‘이종격투기의 경기 해설에 푸코의 정치철학을 얹는 것’을 들었다. “닭장 같은 경기장 안에서 나타나는 몸의 표상이 정치철학과 관련되거든요. 지식인들만의 방언처럼 사용되는 어려운 개념을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만드는 겁니다.”

협동조합에선 강의 주제로 ‘혀를 위한 인문학’ ‘콩을 둘러싼 모험’도 검토 중이다. “몸과 밀접한 주제일수록 대중이 공감하기에 좋거든요. 맛 칼럼니스트와 함께 음식문화 관련 강좌를 개발할 수 있어요. 콩을 둘러싼 국제자본을 짚을 수도 있죠. 사실 인문학만큼 삶과 관련된 것도 없는데, 지금 대학에선 자연과학·인문학·사회과학으로 구획을 나눠 삶에 밀착된 영역을 그냥 잘라 버리고 있어요.”

극작가·평론가·소설가 … 日 학자와 교류도
임태훈 교수는 인문학, 특히 문학과 밀착된 삶을 살아왔다. 서울에서 초·중·고교를 나온 그는 어릴 때부터 공상과학(SF)소설을 읽으며 문학에 대해 ‘첫정’을 느꼈다. 작가의 꿈도 키우기 시작했다. 인테리어업을 하는 부친과 전업주부인 모친은 “하고 싶은 일을 하라”며 응원했다.

성균관대 국문과 2학년 때인 1999년 삼성문학상(희곡 부문)을 받으면서 극작가로 등단했다. 2001년 입대 전까지 인터넷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2006년엔 대산대학문학상(평론 부문)을 받았다. 2009년에는 한국추리작가협회의 ‘추리소설신인상’까지 휩쓸었다. 그럼에도 지적 허기를 느꼈다.

“픽션을 쓰는 것만으론 뭔가가 채워지지 않더라고요. 공부가 필요하단 생각에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인문학에 대해 감정이 애틋해졌어요. 미디어 환경 자체가 바뀌면서 소설 장르의 위상이 유지되지 않는 것 같아 미디어 연구도 시작했고요.”

그는 대학원(성균관대 국문학)에서 ‘소리의 문화사’를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애국가가 울리면 멈춰서 가슴에 손을 올리는 것처럼 소리에 특정한 방식으로 반응하는 사회적 신체를 연구하겠다”는 구상이다. 석사 논문에선 1930년대 소리의 모더니티(근대성)를 살펴봤고, 박사 과정 수료 뒤인 2009년부터 성공회대·계원예대·세종대에서 미디어·글쓰기 강의를 시작했다.

2011년부턴 인문강좌를 열고 관련 서적을 출판하는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강좌 기획을 맡았다. 지난 3월엔 ‘한·일 젊은 인문학자의 대화’를 열었다. 한국에선 ‘이진경’이란 필명으로 유명한 박태호 서울과학기술대 교수가, 일본에선 니혼대·도쿄외대 교수가 각각 참가해 한·일의 인문학 위기를 토론했다.

더 많은 강의료 받게 다른 기관과 연계
그는 팟캐스트 진행자이기도 하다. 2012년 6월부터 팟캐스트 채널 ‘책 읽는 라디오’에서 ‘음파의 기묘한 책 읽기’와 ‘훈꿍쇼’ 등을 만들었다. 특히 자신의 이름을 딴 ‘훈꿍쇼’에선 수유너머N 같은 인문학 운동을 하는 이들을 초대해 토크쇼 형식으로 진행했다. 독특한 유머코드로 이 쇼는 하루에 3000~4000명이 내려받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는 내년 1월엔 대학 시절에 만나 9년째 연애 중인 여자친구와 결혼할 예정이다. 예비 신부는 출판사 에디터다.

그는 인문학협동조합을 통해 하고 싶은 일이 많다. 조합원은 대부분 서울시내 7~8개 대학과 부산대·동아대 등에서 일하고 있는데, 다른 지방의 대학강사에게도 조합 참여를 권유하려 한다. 서울 중심의 인문학 부흥운동이 아니라 지역공동체 활동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다. 또 조합원들이 제대로 평가받아 더 많은 강의료를 받고 강의할 수 있도록 지역문화재단·평생교육원 등과 연계하는 작업도 한다. 내년 상반기부터 연구자들끼리 책을 공유하는 ‘책 순환 라이브러리’, 퇴임 교수들의 장서를 싸게 파는 사업, 외국어 실력이 우수한 조합원이 제공하는 외국어 초록 서비스를 추진한다. 여행 프로그램과 걷기가 결합된 인문학 강좌 ‘길 위의 인문학’(가칭) 사업 구상도 있다. 이것들을 통해 2015년까지 내실을 다진 뒤 협동조합이란 이름에 걸맞게 조합원들에게 사회안전망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요새 협동조합이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지만 2~3년만 지나면 2000년대의 정보기술(IT) 붐이 그랬듯 상당수가 도태될 수 있다”며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석·박사 학위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협업을 통해 활로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래의 인문학은 어때야 할까. 그의 대답이다. “단순히 ‘융합’이나 ‘통섭’에 그쳐선 안 될 것 같습니다. 삶의 구체적인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이야말로 인문학의 본질입니다. 행복해질 수 있는 삶의 지혜를 모색하는 생활인이라면 누구든 인문학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인문학협동조합도 그런 활동의 실천판입니다.”

백일현 기자 keysm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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