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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비인간적인 상황, 가장 인간적인 모습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42호 28면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19~1987) 토리노 대학 화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파시즘에 저항하는 유격대 활동을 벌이다 체포돼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강제 이송됐다. 전쟁이 끝나고 극적으로 생환한 뒤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잔혹한 폭력을 고발하는 여러 작품을 남겼으나 자택에서 돌연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나의 서재 한쪽에는 책이 한 권 서 있다. 표지가 좋아 일부러 꽂아놓지 않고 세워놓은 것인데, 젊은 시절의 프리모 레비가 이탈리아 알프스의 한 봉우리 절벽 위에 앉아 깊은 사념에 잠겨 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박정태의 고전 속 불멸의 문장과 작가 <44>『이것이 인간인가』와 프리모 레비

표지에는 랍비의 잠언이 작은 글씨로 쓰여 있다.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살아줄 것인가? 내가 또한 나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과연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길이 아니면 어쩌란 말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

레비는 유대인이지만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는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그저 주근깨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인종법이 공포되자 자신을 바라보는 교수와 학우들의 시선에서 불신과 경계심을 확연히 느낀다. 반유대주의라는 촉매가 화학반응을 일으켜 그를 이탈리아 사회라는 유기체에서 불순물로 추출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는 화학도답게 불순물의 중요성을 얘기한다. “바퀴가 돌아가고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불순물이, 불순물 중의 불순물이 필요하다. 땅도 무엇을 키워내려면 그래야 한다. 불일치, 다양성, 소금과 겨자가 있어야 한다. 얼룩 하나 없는 미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주기율표상의 화학원소 21개를 제목으로 해서 쓴 연작소설집 『주기율표』의 아연 편에 나오는 것인데, 마지막 순간 그는 대담한 목표를 세운다. 자신이 좋아했던 비유대인 여학생 리타를 집까지 데려다 주며 팔짱을 끼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뿌리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의 팔을 꼭 끼지도 않는다. 그래도 그는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어둠, 공허,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혹독한 시절에 대항하는, 비록 작지만 결정적인 전투에서 승리한 느낌이었다.”

레비에게는 이렇게 동의하기를 거부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와 『이것이 인간인가(If This Is a Man)』를 써낼 수 있었다. 이 작품은 또 한 편의 유대인 생존기가 아니다.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과 슬픔을 담아낸 서사시이자 가장 비인간적인 상황에서 드러나는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그려낸 통찰과 성찰의 글이다.

이탈리아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아우슈비츠로 강제 이송되기 전날 밤의 풍경을 보자. 사람들은 각자 자신에게 어울리는 방법으로 삶과 작별한다. 어떤 이는 기도하고, 어떤 이는 술에 만취하고, 어떤 이는 마지막 욕정을 채운다. 그런데 어머니들은 밤을 새워 여행 중 먹을 음식을 준비하고 아이들을 씻기고 짐을 꾸린다.

“새벽이 되자 바람에 말리려고 널어둔 아이들의 속옷이 철조망을 뒤덮었다. 기저귀, 장난감, 쿠션, 그밖에 아이들이 늘 필요로 하는 수백 가지 자잘한 물건들도 빠지지 않았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내일 여러분이 자식들과 함께 사형을 당한다고 오늘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인가?”

레비는 자신이 체험한 지옥 같았던 나날을 철저히 되돌아보고 기록으로 남겼다. 끝도 없는 절망의 나락에서 그를 건져낸 것은 역설적이게도 추위와 배고픔, 구타였다. 살려는 의지나 불확실한 희망이 아니었다.

“누구나 인생을 얼마쯤 살다 보면 완벽한 행복이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것과 정반대되는 측면을 깊이 생각해보는 사람은 드물다. 완벽한 불행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이 작품의 절정은 레비가 동료 수감자에게 단테의 『신곡』을 들려주는 대목이다.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프랑스인 장에게 그는 지옥 편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귀환 부분을 암송해준다.

“이거야, 잘 들어봐, 귀와 머리를 열어야 해. ‘그대들이 타고난 본성을 가늠하시오. 짐승으로 살고자 태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덕과 지를 따르기 위함이라오.’ 그것은 나팔소리, 신의 목소리 같았다. 잠시 나는 내가 누구인지, 어디 있는지 잊을 수 있었다.”

장은 계속 들려달라고 간청하는데 다음 구절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용서해줘, 최소한 네 줄은 잊어버렸어. ‘산이 하나 멀리 희미하게 나타났는데, 어찌나 높이 솟았던지 그런 산을 본 적이 없었소.’ 그래, 그래. 굉장히가 아니라 어찌나야. 결과를 나타내는 표현이야.” 그는 예전에 밀라노에서 토리노로 돌아갈 때 희끄무레하게 보였던 고향 토리노의 산들을 떠올린다.

장은 다음 행을 기다리며 그를 바라본다. 그런데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다. 마지막 행을 알 수만 있다면 오늘 먹을 죽을 포기할 수 있다고 다짐한다. 그는 눈을 감고 손가락을 깨문다. 내일이면 장이 죽을 수도 있고 그가 죽을 수도 있다. 그는 결론을 내린다. “마침내 바다가 우리 위로 덮쳐왔소. 하느님께서 원하셨던 대로였다오.”

나는 이 장면을 몇 번이나 상상해봤다. 사지는 영양실조에 걸려 앙상하고, 다 떨어진 누더기 죄수복에 맞지도 않는 나막신을 신고, 어깨 위에는 죽통을 걸 장대를 지고서 『신곡』을 암송하려 애쓰는 모습을 말이다. 레비는 말한다. “내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고전과 교양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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