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박완서 "겨울나무가 더 아름답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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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노란집
박완서 지음
열림원, 299쪽
1만3000원

"겨울나무가 봄이나 여름 가을 나무 못지 않게 아름답다는 걸 안 것은 나이든 후였다. 어떤 나무든지 잎이나 꽃을 완전히 떨군 후에 오히려 더 조화롭고 힘차 보이는 게 그렇게 신기해 보일 수 없었다. 벌거벗고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늠름하고, 자체로서 더 보탤 것도 덜 것도 없이 완벽하게 조화롭다.”

 여든에 돌아가신 소설가 박완서 선생이 70대에 들어서면서 쓴 글을 모은 책이다. 책에는 겨울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책 머리에 나오는 소설 형식의 짧은 단편 ‘그들만의 사랑법’에서 주인공 노마님은 우수수 지는 잎을 보면서 "나무는 맨몸이 더 잘생겼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하고, 새벽녘 원두커피를 마시던 저자는 문득 "창 밖의 겨울나무들은 앙상하지만 의연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그런 겨울나무 같다. 스스로 "칠십대란 나이가 싫고 계획에 없던 새로운 세기가 좀 무섭다”면서도 노년의 삶 역시 푸르른 이파리를 매달고 있는 청년의 삶 못지 않다는 걸 알려준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행복해 질 수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행복하려면 사랑하라고 말한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인간은 없다. 아무도 그의 쓸모를 발견해 주지 않았을 뿐”이라며, 남의 장점을 보고 사랑해주면 상대방도 나를 사랑해줄 것이고, 결국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한다. 자신을 각별히 사랑했던 할아버지를 추억하며 "한 세상 살고 나서 남길 수 있는 게 사랑밖에 없다면 자꾸자꾸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묻는다. 삶이 비루해지려는 고비마다 자신을 지탱해준 것도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이었다고 고백한다.

 ‘이제야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도 있다. 오르막 길을 지나면 내리막 길이 있다는 건 그 중 하나다. 내리막을 품위 있게 내려오는 건 올라가는 것보다 힘들다.

 볼품없던 상사꽃이 달빛을 만나 요요하게 빛나는 걸 보면서 그는 "이까짓 세상 왜 태어났을까 싶게 삶이 비루하고 속악하고 치사하게 느껴질 때가 부지기수다. 그러나 삶은 누추하지만 오묘한 것이기도 하여 살다 보면 아주 하찮은 것에서 큰 기쁨,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 싶은 순간과 만나질 때도 있다”라고 깨닫는다.

 "삶을 사랑하기에 죽도록 현역작가이고 싶다”던 저자의 글은 진지하지만 경쾌하고, 젊다. 그래선지 6.25전쟁 때 이야기나 60~70년 전 농촌을 회상하는 글조차 어제 일처럼 쿨하게 읽힌다. "교사가 가장 자주해야 하는 건 덕담”이라거나 "사람도 너무 눈독·손독이 들면 제대로 꽃피기 어렵다” 등은 아이 키우는 부모가 기억해야 할 조언이다.

박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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