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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제자는 필자><제3화>인술개화(10)|정구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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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서울 여의전 설립>
서울 종로 3가에 있었던 내 병원은 1930년대로서는 시설이나 기술 수준이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고 믿고 싶다. 그래서인지 늘 환자가 밀리고 유명 인사들이 찾아 주어서 그 사람들과의 교분도 두터 왔다.
나는 이곳에서 8년 동안병원을 경영했다 이곳에서 나는 서울 여자 외과 대학을 세우게 된 기회를 가진 것이다
서울 여자 외과 대학의 설립을 보게 된 일이야말로 나에게 가장 보람있는 일이었다.
1934년으로 기억이 된 어느 날 환자 한사람이 심호섭씨의 소개장을 갖고 나를 찾아왔다
소개장에는『김종익씨 인데 특별히 잘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진찰해 보니 별로 중병은 아니어서 적절히 치료를 하고 다시 오도록 했다.
알고 보니 김종익씨는 전라도 순천 사람으로 당시 2만 석 군의 재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한번 치료로써 헤어 졌다. 이 분이 바로 서울 여자 의대의 설립 자금을 기증한 분인 동시에 우석대 이사장이던 김두수씨의 선친이다.
그 뒤 얼마 동안 김종익씨는 내 병원에 가끔 왔으나 그다지 깊은 관계는 없었다.
그 무렵 한 사고가 일어났다. 가을이었다. 당시 광업에 성공하여 부자로서 이름났던 최창학씨가 자동차를 한대 샀다. 아주 훌륭한 것으로 늘 자랑해 왔는데 어느 날 송진우(전 한독 당 당수)와 이상협(언론인·동아일보 창간 인), 최창학씨 등 세 사람이 타고 포주로 가다가 지금의 판문점 근처 임진강에서 그 차가 뒹굴어 송진우씨가 쇠골이 부러지고 이상협씨는 허리·다리를 다치고 최창학씨는 비교적 경상이었다.
그래서 송진우씨가 내 병원에 입원 해 있었다.
송진우씨는 나보다 5년쯤 위로 전부터 잘 알고 있었던 사이였다 송씨는 3주의 치료로 개복 했다. 어느 날 침대에 누운 채 나에게『여자 의대나 하나 만들어 보시요』라고 했다
나는『의사가 학교를 어떻게 만들겠소』하고 시원치 않게 대답했다. 그 때 손님이 왔 다기에 나가 보니 김종익씨 이었다. 송진우씨는『나에게 김종익씨가 한 80∼90만 원 있는 분이니 학교를 해 보자고 하시오』하고 거듭 말해서 이튿날 김씨에게 그렇게 말했더니『생각해 봅시다』라고 대답했다.
마침 이 때는 일본 사람들이 일지 사변을 일으켜 중국에서 싸우는 바람에 우리 나라에 있던 미국인들이 슬금슬금 철수하던 때였다.
이 바람에 동대문에 있던 부인 병원을 경영하던「홀」여사가 귀국에 오르면서 이 병원을 김탁원이란 정신과 의사에게 맡겼고 김씨는 이 병원을 자기 처인 이정희씨에게 맡겨 경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부인 병원에 조선 여자 의학 강습소가 부속 돼 있었다. 나는 이 의학 강습소를 서울여자 의대로 승격시키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 의학 강습소는 그때는 경성여자 의학 강습소로 되어 있었다.
나는 이 계획을 김탁원씨와 같은 고향인 이인(전 법무장관)씨가 그때 김종익씨의 고문으로 있는 것을 알고 이인 씨에게 주선해 달라고 졸랐다. 그러는 사이 2년이 지나 36년 10월쯤 이야기가 웬만큼 진척되어 경성여자 의학 강습소의 여자 의학 전문으로의 승격준비 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위원장에 여운형 씨를 추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이 잘 진행되지 않았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김탁원 씨가 자본주인 김종익씨를 마땅치 않게 여기는 때문이었다.
그러는 동안 김종익 씨가 일본에 볼일이 있어 가게 되었는데 몇 번이고 아들을 잘 보아 달라고 나에게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 뒤 얼마 안되어 하루는 이인 씨가 나더러 급히 서울대학 병원으로 오라는 전화를 걸어왔다.
지체하지 않고 달려갔더니 이인씨 말이 김종익씨가 이질로 극히 위독하게 되어 병원에 입원하여 유언을 했는데 유언장에서 여의 전을 세우는데 30만원을 낸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김종익씨의 재산은 2만 석 군인데 이의 대부분을 여 의전 설립을 위해 희사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30만 원을 미망인인 박춘자 여사가 관리하도록 하고 여의 전을 만들자니 그 때 조선 총독부 학무국의 간섭이 심한데다가 설립 자본금은 2백만 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교장은 한국 사람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교장에는 일본인「사또」 를 앉히기로 하고 자금 30만 원도 관리하도록 했다. 그 때 동아일보에서 교장에 정구충이가 취임한다는 기사가 실리는 바람에 나는 한때 오해도 받았다.
일본 사람을 교장으로 앉히기로 하자 일이 잘돼 자본금은 1백만 원으로 하고 우선 10만 원을 예치하게 되어 1938년 5월에 경성여자 의학전문학교인가를 얻었다. 설립자는 김종익씨로 되었다.
나는 이 때 교장 자리는 뺏기고 외과 과장으로 들어갔다.
교사는 지금 우 석 대학이 있는 자리지만 정문은 구 길로 다니게 되어 있었고 거기에는 경성상업 고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교사를 얻기 위해 그때 돈 10만 원을 들여 종 암 동에 건물을 지어 주고 경성상업 고등학교를 이전하게 했다. 이것이 지금의 서울 상대이다.
나는 7년 후인 8·15 해방 뒤에 교장으로 취임했다. 이 대학이야말로 한국인의 자본으로 세운 유일한 외과 대학이라고 자부하고 싶다. 그러나 요즘 운영이 어려워 말이 많은 것을 들을 때마다 김탁원 씨나 김종익씨 등의 뜻으로 미루어 섭섭한 생각을 금하지 못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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