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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국회 외통위원장의 외교결핍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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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박승희
워싱턴 특파원

“사·우·디!”

 미국 워싱턴의 최대 문화공연장인 케네디센터에서 23일 밤 낯선 건배사가 울려 퍼졌다. 건배사를 외친 인사는 안홍준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한·미 동맹 60주년을 축하하는 기념 공연에 앞서 리셉션이 열리던 중이었다. 당초 5분으로 예정된 그의 축사가 15분으로 길어지면서 참석자들의 잡담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갑자기 축사 말미에 안 위원장은 예정에도 없던 건배를 제의하겠다고 했다. 잔이 없는 사람은 손만 들라고 했다. 그러더니 사랑의 ‘사’, 우정의 ‘우’, 디지도록(‘죽도록’의 경상도 사투리)’의 ‘디’를 의미하는 말이라며 “사우디”를 세 번 외쳤다.

 엉거주춤 따라 하는 교민들, 무슨 말인지 몰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미국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통역이 재빨리 “사랑, 우정, 그리고 영원히(forever)를 뜻하는 구호”라고 순발력을 발휘했다. 2000여 명이 초청된 행사장엔 미국 측에서 어니스트 모니즈 에너지부 장관, 로즈 고테묄러 국무부 차관대행, 토머스 컨트리맨 차관보, 연방 의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각국 외교사절도 참석했다. 한국 정치인이 와인 잔을 들고 “사우디”라고 외친 그 순간, 다행히도 주미 사우디아라비아 대사는 없었다고 한다.

 안 위원장의 아슬아슬한 외교 행각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24일 안 위원장은 미국의 연방상원의원 3명과 연쇄 면담을 했다. 인구 3억2600만 명인 미국에서 연방상원의원은 100명에 불과하다. 각자가 대통령 후보라고 생각하는 자리다. 그들이 안 위원장을 만나준 건 ‘국회 외통위원장’이라는 어른스러운 자리가 주는 무게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안 위원장은 그 무게를 모르는 것 같았다. 24일 오후 워싱턴을 떠날 때까지 그는 상원의원들과 찍은 ‘증명사진’을 포함해 19개의 트윗을 날렸다. 그중엔 ‘미 상원 군사위원회 공화당 책임자인 인호프 간사를 만나 전시작전권 회수 연기를 시한을 정하기보다 북한의 도발 상태와 대한민국의 대비 태세의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상원 외교위 카딘 동아태소위원장과 면담해 한·일 관계의 역사 왜곡에 관해 공감하고…’ 등의 민감한 내용도 들어 있었다. 전작권 협상은 한·미 군사당국자들이 그 내용을 쉬쉬하고 있는 사안이다.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워싱턴에서 얼굴이 화끈거릴 때가 적지 않다. 미국 의회나 정부 인사를 상대로 한국의 정치인들이 ‘증명사진’ 찍기 같은 ‘코리안 스타일’을 밀어붙일 때다. 한국 정치가 세계 8위인 경제(무역 규모 기준)와 불균형을 이룬다는 건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3선 의원이자 국회 외통위원장의 외교결핍증이 준 충격은 더 컸다.

박승희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