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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제자는 필자>|<제2화>무성영화 시대(1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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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초야에 묻혀>
「선산집」도 문을 닫고 1년 내내 누워만 있었으니 치료비에 돈도 다 까먹게 되고 말았다. 차차 몸이 회복되어 가자 나는 일 안하고는 못 배기는 성미라 무언가 또 하려고 돌아다녔다.
그래서 66년4월 마포서강의 양화진 나루터에서 「삼미」라는 옥호를 내걸고 조그만 선술집을 차렸다. 6평정도 되는 「홀」과 작은 온돌, 부엌이 달린 허름한 이층집을 20만원에 전세 내었던 것이다.
아무데도 의지할 곳 없는 나는 이렇게 해서라도 억척스럽게 삶을 이어가야 했다. 내가 술집을 내자 옛「팬」들이 또 한사람, 두 사람씩 찾아주기 시작했다. 그래도 날 잊지 않고 찾아주는 손님들이 한없이 고맙게 느껴져 짭짤한 안주를 만들어 정성껏 대접하곤 했다.
그러나 건강하지도 못한 몸으로 손님들 술시중까지 들어야 하는 주모 노릇을 하다보니 몸은 다시 쇠약해지기 시작했고 차차 일어나서 일하는 시간보다 누워 있는 시간이 더 많게 되었다. 그럭저럭 양화진 나루터에서 선술집을 차린지 2년이 되던 해에는 도저히 몸을 가눌 수가 없어 드러눕고 말았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작은 암자나 빌어 여생을 보내고 싶은 생각만 간절했다.
무엇보다도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수양이 필요했다. 그러나 막상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찾아 나서려니 수중에 돈이 없어할 수 없이 「삼미」를 내놓았다.
전세금을 찾아들고 정든 이웃과 친지들의 전송을 받으며 68년4월6일 나는 정처 없이 서울을 떠났다. 이제 나이 60 고개를 바라보며 쇠약한 몸으로 살아가려고 발버둥치는 자신의 모습이 슬프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어디든지 자리잡는 대로 소식을 전하겠다는 작별 인사만 남기고 떠나는 나그네길이라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초조하기만 했다. 몸은 늙고 병들었으니 젊었을 때처럼 닥치는 대로 아무 일이나 할수도 없는 일이고….
착잡한 심정으로 경부선 열차를 타고 대구에서 내렸다. 거기서 바로 버스 편으로 온천물이 춥다는 동해안 평해 온천을 찾았다. 그곳에서 하루를 묵는데 누군가가 청송 약수터에 가면 위장병을 고칠 수 있다고 일러주었다.
그래서 바로 다음날로 청송군 청송면 부곡동 청송 약수터를 찾아 나섰다. 여관에서 1주일을 묵는 동안 산 좋고 물 좋은 곳이 이곳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대로 눌러 앉기로 마음먹었다.
수많은 전설을 간직한 주왕산 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싸 산세가 좋고 약수까지 있으니 더 이상 필요할 것이 없었다. 마침 여관 주인인 노문학씨의 소개로 약수터 뒷산 허리에 마치 여염집 같은 작은 암자를 싸게 살 수 있었다.
호젓한 심산 유곡의 생활에 낙은 붙일 수 있었지만 이미 가지고 온 돈은 바닥이 나 생활은 쪼들리기 시작했다. 온전치 못한 몸으로 나무도 하고 지게도 지고 또 장작을 패고 약수도 길어와야했다.
집 뒤에는 산을 깎아 2년 동안 호미가 닳도록 밥을 일궜다. 이 밭에다 지난 봄에는 무·호박 등을 가꿨고 지난가을에는 배추를 심어 김장감을 마련했다.
옆방에는 입시 공부를 위해 산욕을 찾는 학생들에게 하숙을 치기도 했지만 아직까지 불상하나 구해 다 모셔 놓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제는 나를 기억해서 찾아 주는 사람 하나 없다. 처음에는 이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싶었지만 이제는 너무나 외로와 미치도록 사람이 그리워진다.
날이 갈수록 병은 한 두 가지씩 늘어만 가고 약 한첩 사먹을 형편도 못 되니 약수로 목을 축이고 누워 있는 것이 고작일 뿐이다.
『아리랑』의 신일선으로 기억해 주는 옛날의 「팬」들에게는 나의 비참한 모습을 얘기 하는 것조차 부끄럽고 송구스럽기 그지없다.
땅거미가 지고 깊은 산 속에서 홀로 남게 되면 나는 고목을 달래기 위해 옛 시절의 「아리랑」을 조용히 불러 본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청전 하늘엔 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수심도 많다.
이 노래를 부르면 나는 항상 마음이 설레고 지나간 시절들이 그리워진다.
춘사 나운규씨의 『아리랑』에 「피컵」되어 인기를 한 몸에 받던 그 시절이 이제는 꿈만 같이 여겨진다.
춘사도 가고, 다 가고 없는 이 세상에서 나 혼자만 남아 구차하게 살아가려는 자신의 모습이 추하고 서글프게 느껴지기만 한다. <제2화 끝>
※다음 제3화는 의박 정구충씨의 이야기를 싣습니다. 【신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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