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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제자는 필자|신여성교육(10)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독립운동>
1910년 한·일 합방이 된 이후 여학생들은 비밀결사를 만들어 지하운동을 하기도 했고 일인교사배척, 등교거부 등 음성적인 항일투쟁을 벌였다.
숙명에서는 합방되던 해 11월 이른바 명치천황의 생일에 졸업반생 l6명이 모두 등교하지 않았고 2학년생들은 기념식에서 받은 축과를 변소에 던졌다는 얘기가 있다.
이화에서는 내가 다닐 때 일본어를 가르치던 소오다(증전)선생이 교실에 들어오면 학생들이 일제히 책을 엎고 들아 앉아버려 선생은 앞에서 졸고 앉았다가 나가곤 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소오다 선생은 아펜셀러 당장에게 학생들을 더 가르칠 수 없다고 울면서 호소하자 당장은 학생들을 모아놓고 『원수나라의 말을 모르면서 싸울 수 있겠느냐』면서 일어를 방언으로 알고 배우라고 타일러 마지못해 배운 일이 있었다.
이런 관계 등으로 1920년대까지의 이화학생들은 일어를 잘하지 못했다.
전주 기전여학교에서는 임영신씨 등이 결사대라는 조직을 하여 교실에 걸린 천황의 사진을 떼어버리고 사진의 눈알을 연필로 찌르기도 했다하나 이 역시 교내문제에 그친 것이었다.
평양의 숭의에서는 1912년 일어가 필수과목이 되고 고바야시(소림)선생이 부임해오자 학생들이 교실에서 일어시간만 되면 곯리느라고 우리나라말로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하며 뜨거운 호떡을 『다베나사이』하면서 입에 넣어주어 골탕을 먹이기도 했다한다.
황신덕씨 등은 송죽동지회를 만들어 돈을 모아 상해임시정부로 보내기도 했고 국산품 입기 운동을 폈다한다.
1919년l월21일 고종이 승하하셨을 때 이화학생들은 옥당목 치마·저고리로 거상을 입고 검정댕기를 드리고 덕수궁 대한문 앞에 깔린 멍석에 엎드려 울기가 일쑤였고 숙명학생들은 학년단위로 학교를 빠져 나와 망곡을 했다한다.
고종황제의 승하를 개기로 전국 곳곳에서 거사를 위한 비밀회합이 거듭되었는데 이화에서는 신마숙 박인덕 신준려 김활난 황애덕씨 등 10여명과 정신출신의 김 마리아씨 등이 자주 모여 만세 부를 일을 토의했다.
3월1일 학생들이 일제히 밖으로 나가 만세대열에 참가하려하자 프라이 당장은 앞을 막아서며 『내가 있는 동안은 너희들을 내보내 고생시킬 수 없다. 나를 밟고 넘어갈 테면 가라』고 적극 말렸으므로 물밀 듯이 나가던 학생들은 잠시 주츰, 30여명밖에 나가지 못했다.
김활난 선배는 교회와 여성단체로부터 자금을 거두어 해외의 독립운동단체에 보내는 비밀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3·1운동 때 앞장서지는 못했다.
나는 신준려 선생 등 선배들이 몸이 약하니 남아있어서 혹시 감옥에 잡혀가는 사람이 있으면 뒷바라지나 맡으라고 하는 바람에 7, 8명의 학생과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이날 신준려·박인덕 두 교사가 주동자로 몰려 서대문 감옥소에 수감됐다.
유관순, 서명학 (현 이화여고교장) 김분옥 (전 이대교수)등 고등과 1년생 6명은 결사대를 조직, 백지에 지장을 찍어 굳은 맹세를 한뒤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가려 했으나 선생들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이튿날 남대문에서 있은 손병희·선생의 연설을 듣고 만세를 부르다가 잡혔으나 곧 석방됐다.
서명학씨는 3·1운동 때 담 밑에 엎드려 다른 학생들이 자기를 타고 넘어가도록 해주기도 했다.
유관순은 3·1운동전해인 1918년 고등과에 입학, 중등과 졸업반인 나와 기숙사에서 한방에 있었으나 성격이 활달하고 선배들의 다리미질 등 잔심부름을 잘해주었다는 것이 기억난다. 또 농구·배구 등 운동을 좋아했다.
각별히 친하던 서명학씨는 1904년 천안 목천에서 태어난 관순이가 14세 때 선교사 사부인을 따라 이화학당에 입학했다고 말하고 있다.
3·1운동으로 모든 학교에 임시 휴교령이 내려져 학생들이 모두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관순이는 고향에 가서 3·1운동 때 만세를 부르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동지를 규합, 음력3월1일 12시에 장터에서 만세를 불렀다한다.
그는 공주감옥에서 3년 실형언도를 받고 서울 복심법원에 상고, 서울로 압송됐으나 일인재판장에게 재판을 받지 않겠다고 의자를 던지며 대드는가하면 옥중에서 계속 만세를 불러 3년에서 7년으로 형량이 늘어났다.
결국 관순이는 모진 고문 끝에 몸이 쇠약해져 다음해 10월16세의 어린 나이로 숨지고 말았다. <계속> 【서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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