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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사랑』이 남아도는 원시식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우폴루」섬의 동쪽으로 갔다가 당일로 돌아오기로 했는데, 하루 한 번밖에 왕복하지 않는 「버스」를 그만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오늘밤은 어디서 또 신세를 지나 하고 생각하다가 바닷가의 원주민마을을 찾기로 했다. 나그네가 먼 길을 가다가 해가 저물어 희미한 등잔불이 켜있는 오막살이집을 찾아가는 우리 나라 옛 이야기처럼 어떤 집을 찾아가 추장집을 대달라고 했더니 친절히 인도해준다.
매우 반기며 방에서 뛰어나오는 추장에게 우리 나라의 인사법으로 꾸벅 머리를 숙이고는 나의 여행이야기를 했다. 그는 늙은이건만 『반갑소이다. 그처럼 먼 나라에서 찾아오시니 정말 귀한 손님이시군요』하고 깍듯이 존사를 쓰면서 손수 나의 무거운 「룩색」을 내려주며 『이렇게 무거운 짐을 어떻게 지고 다니지요!』하며 적이 놀란다. 「사모아」사람인 「폴리네시아」인종은 「아시아」에서 왔다는 때문인지는 모르나 생활감정이 어울리는 듯 해서 더욱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 새삼스럽게 「괴테」적인 또 하나의 「사랑의 친화력」을 발견했다. 이들은 더욱 강한 사랑의 자력을 지니는 듯, 이해관계를 떠난 순수한 인류애로서 맞아주었다. 어쩌면 이들의 사랑은 바다의 폭풍우처럼 강한지도 모른다.
옛날 같으면 이들은 사람을 해치던 야만인이었건만 이젠 그런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애정공동체」로서의 「사모아」사회를 이루었다. 이 늙은 추장의 자비스러운 표정엔 성자「요한」이나 「바오로」 못지 않은 사랑의 위엄이 엿보였다. 후광이나 원광이 비친다면 좀 지나친 과장일는지 모르나 섬광처럼 잠깐 비친 이 노추장의 표정에는 정녕 인간적인 참모습이 비쳤다.
수평선너머로 불덩어리 같은 시뻘건 석양이 뉘였뉘였 지고 있었다. 이 추장집에서는 나를 귀객으로 생각하고 저녁 음식을 차리느라고 법석을 떨었다.
특히 그의 딸은 애인처럼 반겼다. 이들의 사회엔 어떤 정신적인 장벽이 없어 보였다. 사랑으로 시간을 헤아리는 사고방식이 아닌가보다. 온 가족뿐만 아니라 딴 집 아낙네들이 와서 저녁을 차리느라고 준비하는 동안 추장에게 몸을 좀 씻고 오겠다고 하고는 바로 앞의 바닷가에 나갔다. 저녁 햇빛을 받고 바닷가의 산호모래가 신비스러운 빛깔을 띤다.
그전 호주에서 딴 짐과 함께 수영복을 잃었었기에 「팬츠」 바람으로 바다에 들어가 헤엄을 쳐서 땀을 씻고는 곧 추장집에 돌아왔다. 식사를 다 차려놓았다고 어서 들자고 하기에 옷을 갈아입으려 했지만 벽이 없는 집이라 적당한 데가 없다. 그래서 집모퉁이에서 납작 주저앉아 기술적으로 젖은 「팬츠」를 벗고 하의를 껴입고 있는데 어쩌면 「스트립쇼」처럼 보였던지 이 집에 모인 사람들 특히 여자들은 동양인이라고 해서 나의 육체에 큰 호기심을 가지고 못보는체 하면서도 자꾸만 몰래 엿보았다. 미남의 신 「아폴로」가 되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식탁에는 소금과 「코코」 야자기름을 섞어 「바나나」껍질로 여러 겹을 싸아, 시뻘겋게 단돌 위에 올려놓고 지은 이 나라의 독특한 밥이 올랐는데 「코코」야자기름으로 쌀이 익어서인지 등잔불 아래서 보니 밥알이 어찌나 반질반질한지 진주알과도 같았다. 「바나나」껍질에다 익힌 것이니까 그 향기가 스며들어서 향긋한 냄새가 풍긴다. 그리고 물고기를 졸인 것, 또는 고구마인 「얌」을 삶은 것들로 상다리가 휘도록 진수성찬을 차렸다.
늙은 추장은 자기 맞은편에 나를 앉힌다. 얼마 전 「통가」왕국에서도 큰 대접을 받았지만 이 나라 사람들도 매우 손님대접을 잘 하는 풍습이 있는가보다. 토주를 마시라고 자꾸만 권하지만 너무 마셨다가는 큰 실수라도 할지 몰라 사양하였더니 추장은 『보아하니 몸이 건장하여 술이 셀 것 같은데 어서 사양 말고 잔뜩 들어요』하며 자꾸만 권한다.
추장이 하도 잔을 들라고 하기에 그 호의를 저버릴 수 없어서 큰 사발로 서너 잔 들이켰더니 거나하게 취하였다. 그리고 추장의 딸은 자꾸만 음식을 권한다. 정말 사랑이 남아 돌아가는 사람들이다. 추장이라고 여유가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야기에 꽃을 피우다가 우리 나라 이야기가 나와서 분단된 같은 비극을 지닌 나라 사람끼리는 더욱 공감하게 된다고 말했더니 그는 감동하며 나의 손목을 꼭 쥐는 것이었다. 밤은 깊어가는데 교회에서는 우렁찬 찬송가가 이 밤을 성화시키는 듯 은은히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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