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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 행렬 속에 허탈한 「파리」|드골 별세와 프랑스 내외 표정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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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엘리제궁엔 큰 인파>
【파리11일 UPI 동양】거인「드골」의 죽음을 애도하는 「파리」에는 10일 밤 익명의 검은 조장을 두른 재향 군인「데모」상가 한 밤의 중심 가를 누비며 수백만「프랑스」인의 슬픔을 상징했다.
이들이 서서히 두들기는 고수들의 북소리에 맞추어 침묵「데모」를 벌이는 동안「러쉬아워」의 바쁨을 잊은 듯 모든 차랑은 음향을 줄였고 연도의 시민들은 북소리에 동조하듯 발걸음을 멈춘 채 이 행렬을 지켜보았다.
고인이 11년간의 주인 노릇을 하다가 1년반 전에 물러난「엘리제」궁 안에는 애도의 인파가 몰렸다. 계보가 알려진 것은 10일 상오9시40분이었으나 이날 하오1시「퐁피두」대통령의 전국 방송을 통해 최초의 반응이 있기까지「프랑스」인은 아무런 표현조차 할 수 없는 슬픔 속에 잠겨 있는 듯 했다.
「엘리제」궁의 경호 관이 어느 부인을 뒤로 물러서게 하자 그녀는 『장군께서는 다시 이곳에 올 거예요, 여긴 그분의 집』이라고 하면서 한 발도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어느새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정문입구에 조화가 놓여 있었다.
의회는「드골」파 지도자「마르크·자케」가『여러분 우리의 영도자가 죽었습니다』하고 호곡하는 가운데 휴회에 들어갔다.
이날 밤의 폭우를 무릅쓰고 고인이「파리」에 있을 때면 으례 사무를 보아온「센」강 좌안의 사무실에는 조문명의 서명이라도 하고 싶어 몰려든 수천의 인파가 줄을 지었다.
일단의 좌익계 학생들이 반「드골」「슬로건」을 걸고「데모」를 벌이다가 다른 파에 여지없이 몰매를 맞았다.
「샹젤리제」가의 개선문에서「앙리·뒤비야르」재향 군 인상은 시민들과 함께 무명용사의 묘의 횃불을 점화했다.
「프랑스」정부는 12일을 국상 일로 정했는데 이날을 기해 학교 관청 극장 음악회 및 증권시장도 철시한다.
이날의 92차 월남 평화회담도 휴회키로 했다.

<미망인 관 곁서 오열>
【콜롱베·레·되제글리즈(프랑스)12일 AP 동화】「드골」장군의 관을 비치는 희미한 촛불이 켜진 방에서 남편의 죽음을 지키는「이본」미망인의 오열도 12일 종말에 이르고 있었다.
눈물로 얼룩진「이본」여사는「프랑스」국기로 덮인「드골」장군의 나무 관을 보기 위해 방에 들어오는 극히 제한된 문상객들을 맞았다.
「드골」이 1940년 당시에 던 회청색의 낡은 군모 하나가 관머리에 놓여 있었다. 문상객들은 푸른 철제 문 앞에서 장군의 관을 바라보았다.

<회고록 20만 부 재판|미, 장례식 생방송
【뉴요크11일 AP 동화】「드골」장군의 서거를 둘러싼 몇 가지지 이야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에브뤼」(프랑스)=「드골」장군의 회고록 제1집 20만 부가 곧 추가로 인쇄 될 것이라고 11일 이곳에서 발표되었다.
『희망의 회고록』이란 제목의 제l집은 지난 달 약40만 부가 초판 되었으나 모두 매진되었다. 「드골」장군은 제2집을 집필 중 서거했다.
▲뉴요크=미국의「텔레비젼」방송망들은 「드골」장군의 장례식 광경을 인공위성을 통해 생방송으로 중개한다고 발표했다.
▲동경=중공 당 주석 모택동과 부주석 임표는 「드골」장군의 장례식에 화환을 보냈다. 중공의 「파리」 주재 대사「쿠안·첸」은 12일의 장례식에 중공대표로 참석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동경에서 청취한 신화사 통신은 모택동이「이본」여사에게 보낸 조전에서『드골」 장군의 불행한 서거에 접하여 나는 미망인에게 깊은 애도의 뜻과「드골」장군에 대한 진지한 존경을 표한다. 장군은 「파쇼」침략에 대항하여 그리고「프랑스」의 독립을 위해 싸운 용감한 투사였다』고 말했다.
▲동경=월맹 통신은 월맹 대통령「톤·둑·탕」이 「드골」장군의 서거를 애도하는 조전을 보냈다고 전했다.

<향리엔 기자들 운집>
【파리=장덕상 특파원】「프랑스」의 영웅이며 동네의 어른을 잃은 「드골」대통령의 고향 「콜룽베·레·되제글리즈」의 작은 마을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12일 하오에 있을 장례식을 앞두고 고인의 고현을 찾는 수천 조객과 이를 보도하러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수백 명의 기자들로 「파리」에서 2백50㎞ 떨어져 있는 인구 3백 명의 이 작은 고을이 붐비고 있다.
시청에 마련된 조객 록에 「사인」을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일대 장사진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몇 개밖에 없는 「카페」도 대만원. 임시로 마련된 「프레스·센터」엔 20여 대의 전화가 불이 나고 6대의 「텔리타이프」도 쉴새없이 움직이고 있다.
또 「유럽」각국의 TV중계방송 차들이 좁은 마을길을 꽉 메우고있다.
한편 고인의 유해가 모셔진 곳의 집 접근은 일체금지 되고 있으며 12일「미사」가 있을 마을교회에만 수천 조객이 모여 고인의 명복을 빌고 있다.「드골」의 장례식은 3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작은 마을교회에서 가족과 친지, 약간의 군대 대표가 모인 가운데 거행 된 후 교회 옆 조그마한 공원묘지에 있는 딸 옆에 묻히게 된다.

<스트라스부르 읍 선 드골 특 군가 명명
【스트라스부르 (동프랑스)11일AFP 합동】전「프랑스」수상이었으며 현재는「스트라스부스」시장인 「피에르·프렘랑」씨는 11일 이 시의 한 주요거리를 『「드골」장군의 거리』 로 명명하기로 결정했다.
시의회는 이날 특별 회의를 열고 2차 대전 당시「스트라스부스」시를 구출한「드골」장군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시장의 그러한 제의를 승인했다.
그런데 1944년 말 독일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친「드와이트·아이젠하워」구주 주둔 연합군 최고 사령관은 당시 독일 군으로부터 해방 된지 얼마 안 되는「스트라스부스」시에서 철수할 것을 신중히 고려하고 있었으나「드골」장군의 반대로 철수 결의를 번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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