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골 영광의 점화 알제리「58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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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58년5월13일이 없었던들「드골」이 세계사와「프랑스」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달라 졌을 것이다.『「드골」장군 만세』라는「알제리」군부의 구호로 또 다시「프랑스」의 권좌에 복귀한「드골」은 천재적인 책략가이기도 했다. 1958년5윌13일 이야말로「드골」복귀의 극적인 사태가 전개되던 순간이었다. 그 날의 사태를 장장 전권 12권의 방대한 전후「프랑스」사화 속에 적어놓은「프랑스」유수의 사가「레이몽·카르 티에」의 글을 근착 11월 7일자 불「파리·마치」지에서 간추려 옮겨 싣는다.
「레이몽·가르티에」기=1958년 5월12일.「파리」거리에는『「드골」이 나와야「프랑스」는 다시「프랑스」가 될 수 있다』는 벽보들이 나 붙었다.「알제리」에선「알제리」해방 전선(FLN)에 의해 사살된 3명의「프랑스」군인을 찬양하는「플래카드」와 성명서기 터지는 판이었다.
이미 4일 전부터「알제리」의「프랑스」국수 주의자들은「파리」정부의 전면적인 개편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리」정부의「수스텔」이나「미셀·드브레」는 속수 무책으로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못했다.

<공수부 대원 첫 봉기>
저녁 6시가 되어오자「알제리」시가엔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학생 연맹지도자「라케야르드」를 선두로 한 우익군중들은「조르지·클래망소」광장을 향해 물밀듯 몰려들었다.「GG로!』라는 구호가 천지를 뒤덮었다. GG는 광장 근처에 있는 정청을 말하는 것이다.
「라케야르드」는 원래 예비역 중위. 이날은 공수부대 원의 표범 무늬 전투복을 입고서 군중을 광장으로 몰고 갔다.

<알제리 장악이 목표>
정청 경비대는 최루탄을 몇 개 던지는 정도의 보잘 것 없는 수비나마 집어던지고 어느 틈엔 가 달아나 버렸다.「라케야르드」는 붉은「베레」모를 손에 들고 휘두르며 미친 듯 정청으로 돌입해 층계를 뛰어 올라갔다. 흥분한 군중들은 정청을 쑥밭으로 짓밟아 버렸다. 「알제리」주둔군 사령관 「마쉬」장군이 아수라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30분.「라게야르드」는 군중을 대신해『알제리』를 구출하기 위해서는 군민합동회의 구국 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주둔군 사령관 합세>
잠시 생각하던「라쉬」장군은 드디어「위」(가)를 선언,「알제리」우상군부의 봉기가 본결화 했다.
광장을 메운 군중을 향해「알제리」군정은「발코니」에서「막리」정부의 개편을 주장하는「플래카드」를 흔들어 보이고.「마쉬」장군의 이름으로「파리」정부에 전문을 띄웠다.
『나의 지휘하에 성립한「알제리」구국 위원회는「파리」정부의 개편을 요구하려, 그것만이 「프랑스」영토인 「알제리」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반란」의 소식이 「파리」에 전해진 것은 밤 8시 50분.

<정청서 발표 금지령>
급전직하로 표변한 사태를 모면하기 위해「마쉬」장군은 최후의 수단을 생각해 냈다. 13일 오전5시「마쉬」장군은「난국타개의 유일한 길은「드골」장군의 복귀』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것만이 또 하나의『디엔비엔푸』를 피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군부는「드골」만이 자가들의 반란을 위기에서 구출해 줄 것으로 믿었다.

<드골, 중책을 수락>
「알제리」전역에 확대된 군 정부의 조직을 한 손에 휘어잡은 반란정권의 정점엔「살랑」장군이 올라앉았다. 이 조직을 고스란히 「드골」이라는 신화적 존재로 합리화하려는 것이 그들의 개략이었다.
「살랑」장군은「발코니」로 나가 군중을 향해『「드골」장군 만세!』를 선창했다. 그리고 다시 정청으로 들어오면서『자, 저관 들, 이제 일은 벌어졌소. 만족들 하시오?』하고 반문했다.
14일「드골」장군은「공화국의 중책을 맡겠다』는 성명을 발표. 각본은 제대로 이뤄지는 듯 싶었다. 그러나 장군의 성명은 「알제리」에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던 것.
군인인 동시에 천재적인 개략가인「드골」은 「알제리」군부의 덕택에「콜롱베」로부터「막리」로 돌아오면서도 속으론 딴 마음을 품고 있었다.「드골」은『「프랑스」의「알제리」대신 「알제리」없는「프랑스」의 영광을 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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