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제삿날 알게 돼 이제야 자식 도리 할 듯" … 60년 만에 설레는 만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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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내 몸이 성치 않아 걱정이지만, 부모님 제삿날이라도 알아야 하지 않겠나.”

 김동빈(79·강원도 강릉시)씨는 16일 북한의 누님 정희(80)씨와 상봉하게 됐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면서 “꼭 금강산에 가겠다”고 말했다. 김씨가 누님 정희씨와 헤어진 건 10대 후반이던 1951년 1·4후퇴 때다. 황해도가 고향인 김씨는 곧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6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김씨는 지난 6월 폐암 진단을 받아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

 오는 25일 금강산에서 열리는 남북 이산상봉에 참여할 남북 양측의 가족이 확정되면서 이들의 애달픈 사연이 속속 전해지고 있다. 정전 60년을 넘기면서 이번 상봉에는 90세 이상 28명이 포함되는 등 고령 실향민들의 비중이 크게 늘었다. 김씨처럼 병들거나 거동이 불편한 경우도 많아 보호자가 동반해야 한다. 상봉장에 갈 실향민들은 추석명절 준비보다 북측 가족에게 전할 선물과 사진·편지를 챙기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강원도 통천이 고향인 이명호(81·강원도 속초시)씨는 “막내동생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너무 좋아 잠이 안 온다”고 말했다. 이씨는 1950년 12월 부모님과 막내동생 철호(77)씨를 고향에 남겨둔 채 2명의 형님과 함께 월남했다. 부모님 생일날에 제사를 지내왔다는 이씨는 “부모님 제삿날이 언제인지, 어떻게 사시다 돌아가셨는지 알 수 있게 돼 이제야 자식의 도리를 조금이라도 할 수 있게 됐다”고 덧붙였다. 이씨는 귀가 어둡지만 눈으로, 얼굴 표정으로, 필요하면 필담으로 그동안 못다 한 얘기를 하겠다고 말했다. 이씨는 추위를 막아줄 수 있는 옷과 생활필수품, 영양제와 감기약 등 가정상비약을 동생에게 줄 선물로 준비했다.

 황해도가 고향인 이명한(88·여·강원도 원주시)씨는 “비록 부모와 형제는 만나지 못하지만 조카들을 만나 가족 소식을 들을 수 있게 돼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이씨는 부모형제 가운데 유일하게 남동생 이광한(68)씨가 살아 있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몸져누워 있어 대신 여동생의 딸과 아들을 만나게 된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서운하지만 그렇게라도 혈육을 만날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박운형(92·경북 경산시)씨는 이산가족 상봉 신청 20년 만에 북한의 가족과 만나게 됐다. 아들 박철(60)씨는 “아버지는 한시도 고향을 잊으신 적이 없다. 자식들은 안경 너머로 아버지가 눈물 닦는 걸 보며 자랐다”고 말했다.

 남북한은 16일 오전 판문점 채널을 통해 추석 계기 이산상봉에 참여할 남측 96명(당초 100명이었으나 건강 문제 등으로 포기), 북측 100명의 명단을 확정했다. 금강산에서 열릴 상봉은 먼저 25일부터 27일까지 남측 신청자 96명이 북한에서 온 가족 200여 명과 만난다. 이어 28일부터 30일까지 북한이 선발한 100명이 남측에서 간 400여 명과 상봉한다.

 남측 최고령자는 95세인 김성윤(여)·민재각씨다. 김씨는 여동생 석려(80)씨를, 민씨는 손자 지영(45)씨 등을 만나게 된다. 북측 최고령자는 권응렬(87)씨로 남측의 동생 경옥(83·여)씨와 만난다.

이찬호·정원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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