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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전 일본육군사관학교 동기생들이 본 영친왕)이왕 전하 도전정순
이왕 전하는 명치30년(1897) 10월20일 어탄생, 이왕 조제 26대 이태 왕의 책7남자, 명치38년 왕세손에, 명치40년 태왕의 양위·형군의 인위로 왕세자가 되었는데 한국은 완전히 일본의 보호국으로서 통감정치로 들어가 다음해 초대통감 이등박문은 아직 나 어린 왕세자에게 신시대의 교육을 하라고 여러 학우들과 함께 동경으로 데려왔다. 보는 바에 의하면 더구나 한국사람이 볼 때에는 허울좋은 인질이 된 것이라고 생각한대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윽고 명치 43년8월29일 한국은 일본에 합병되고 이 왕가에 대해서는 황족의 대우를 주게되었다.
그때부터 쭉 일본 내지에서 지내시게되어 다음 44년9월1일에는 학습 원으로부터 동경 중앙 유년학교 예과 제2학년에 전학, 우리 육사 제29기의 일원으로 참가하시게 되었다. 명치천황의 뜻으로 황족의 남자는 군 적에 들어가는 것이 원칙이므로 이왕 전하도 똑같은 길을 걸어가시게 된 것이다. 이왕 전하는 11세 때에 동경으로 오시어서 인생의 태반을 일본에서 지내셨다.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지난번. 왕 전하가 귀국하셨을 때에 한국의 신문이<인질로부터 돌아온 황태자>라고 쓴 것도 .지금에 와서는 무리가 아니라고 하겠지만 적어도 우리들 군인 더구나 동기생에 있어서는 가장 친하고 경애하는「왕 전하」로 인질이라든가 이방인이라는 종류의 감정은 털끝만큼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오랜 일본에서의 생활 중에는 여러 가지 마음의 부담도 많았을 것이요, 고독한 비애에 잠긴 때도 없지 않으셨을 것이다. 말하자면 왕 전하라는 고귀한 신분에 맞지 않게 폭이 넓은 소위「된 사람」이라는 어인 품도 확실히 어렸을 때부터 타국·타인사이에 끼여서 살아온 자연의 수업이 그렇게 만든 것인지 모른다.
지나에 예속 되어온 태평천하의 한국이 복잡한 근대적 국제관계에 휩쓸려서 일청·일로 각 축의 희생이 되어 드디어 일본에 병합되었다. 그 이 왕조 최후의 주세 자로 혼란한 가운데 탄생하시와 어렸을 때부터 이역에서 망국의 한탄을 혼자서 하지 않으면 아니되게되었으니 참으로 기구한 운명에 태어난 왕 전하였다.
그만큼 이왕 전하의 오직 하나의 마음의 위안은 거짓이 없고 솔직한 인적관계의 군직에 전념하시는데 있지 않았던가 한다.
그리하여 거기서 동기생에 대한 따뜻한 마음으로부터의 친근감이 생기는 결과가 된 것이라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말이라고 할까?
명치 43년, 내가「히로시마」(광도) 유년학교에 입학한 해의 봄이라고 생각되는데 당시 이주전하는 이등통감의 등반으로 한국 황태자 자격으로서의 최후의 여행을 하신 일이 있어서 미자 중학에 재학 중이었던 나는 봉영의 열중에서 귀여운 군복차림의 왕세자를 호기심에 가득 찬 눈초리로 바라보던 일이 생각난다.
그후 3년, 나는 중앙유년학교의 생도가 되었다. 매주 토요일의 야외연습 때에, 지금은 동기생이 된 전하를 뵈오면 언제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중학시대의 추억을 하게되는 것이었다. 2학년 때였던가 전하가 수두에 걸린 일이 있었는데 나도 그 유행병에 걸려서 수일 동안 의무실에 격리되었다. 전하 바로 옆 병상에 누워있는 사람은 옛 학우인 조대호인데, 심심하고 지루할 때에는 그가 전하와 함께 처음으로 일본에 왔을 때의 추억을 들려주었다.
예를 들면「시모노세끼」(하관)에 상륙하여 이등통감이 데리고 간 춘범누라는 요릿집의 일본 요리가 어찌나 싱겁고 맛이 없던지 혼이 났다는 이야기 등,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왕 전하의 모습은 당시의「전하」가 아니고「요나꼬」 (미자)역 두에서 마중 나가 뵈옵던 나이 어린 군복차림의 왕세자의 그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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