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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에 바란다] 中. 송기인 신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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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상하게도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은 당선과 취임의 기쁨을 즐길 겨를도 없이 바로 대통령의 자질을 시험할 만한 험난한 과제를 만났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취임 선물은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결정이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IMF외환위기를 취임 선물로 받았다.

현재 노무현 대통령도 북핵 문제, 대북송금 문제, 그리고 대구지하철 참사까지 연이어 터져 YS.DJ 못지 않은 가혹한 취임 선물을 받고 있다. 盧대통령은 과연 이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국민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지도적 위치에 있는 한 사람의 판단력이 얼마나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우리는 대구 지하철 참사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방화 테러와 초기 진화의 실패, 지하철 방재시스템의 작동 불능, 불연재를 사용하지 않은 열차 내장재 등 여러 가지가 참사의 원인으로 거론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건 승객을 보호해야 할 기관사가 승객들에게 기다려 달라고 안내방송을 하고 자기만 피해버렸다는 사실에 국민은 분노를 넘어 절망하고 있다.

나는 이것이 단순한 지적 판단력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지도자가 얼마나 똑똑한가라는 문제보다 그가 얼마나 진정으로 백성을 책임지고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인성의 문제라고 본다.

이 기관사를 보면서 6.25전쟁 때 방송국에 우리 국군은 용감하게 잘 싸우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녹음 테이프를 돌려놓고 혼자 피난가 버린 이승만 대통령이 떠올랐다.

나는 대통령 후보들의 TV 토론을 볼 때마다 왜 패널들이 대통령 후보가 국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국민에게 얼마나 겸손한지를 철저하게 검증하지 않는지 가장 불만스러웠다.

그것이 경제수치를 달달 외우고 정책공약을 기계적으로 나열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말인가. 어찌된 일인지 정치인들은 국회의원이나 시의원, 심지어 구의원에라도 당선되면 그것도 권력이라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싹 바뀐다.

내가 알기로 세계에서 제일 큰 무덤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도, 중국의 진시황릉도 아니다. 일본 오사카의 인덕왕릉이다. 한국계로 알려진 이 일왕은 백성이 가난해 굴뚝에서 연기가 오르지 않는 것을 보고는 즉위하자마자 백성의 노역을 모두 면케 한 뒤 백성들과 똑같이 해어진 의복과 신발을 신고 비바람이 들이치는 집에 살았다. 백성들은 이 왕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가 왕이 죽자 세계에서 가장 큰 무덤을 만들어 줬다고 한다.

개혁, 개혁 외치지만 이제는 정말 권위주의적이고 제왕적인 대통령상부터 개혁돼야 한다. 말로만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라고 하지 말고 정말로 대통령이 몸소 나서 국민을 대통령으로 모시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바뀐다. 우리 서민들은 시청에만 들어가도 벌써 주눅이 들어 버리는 현실이 아닌가.

그런데 나만의 우려일까. 내가 보기에 벌써 대통령의 걸음걸이가 조금 바뀐 듯싶다.

전에는 발걸음이 서민적인 걸음걸이였는데, 언제부턴가 약간 다리가 벌어지면서 어깨가 건들거리고 힘이 들어간 듯이 보인다.

지금 TV에서는 역사 드라마 '무인시대'가 인기를 얻고 있는데 무신들의 권력투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사람은 최충헌이었다.

최충헌은 초기엔 누구보다도 강력한 개혁적 강령을 내걸었다. 그는 봉사 10조에서 '권력자가 빼앗은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줄 것. 세금을 공정하게 걷을 것. 탐관오리를 처벌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자기 사병 집단을 눈덩이처럼 불려나가고 농민들의 땅을 빼앗아 자기의 농장으로 만들어 자기가 한 공약을 헌신짝처럼 던져 버렸다. 우리의 역대 대통령도 대체로 최충헌의 길을 걸어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16대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가장 겸손했고 가장 성공한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러햄 링컨이었다.

대통령 복이 지지리도 없다고 불평하는 우리 국민도 이제 링컨과 같은 멋진 대통령을 가질 기회가 왔다고 믿는다. 盧당선자가 당선 사례에서 한 말 "국민의 머슴이 되겠습니다"라는 그 초심을 올곧게 지켜 국민 모두에게 성공한 첫 대통령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송기인 신부='부산의 양심'으로 불리는 부산지역 재야 세력의 대부다. 정의구현사제단의 창립 멤버이기도 한 그는 1970년대 후반 한국에 해방신학을 처음 들여왔다.

盧대통령과는 82년 부산 미문화원 사건 때 당시 盧변호사가 무료 변론을 맡으면서 알게 됐다. 88년 김영삼(金泳三)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에게서 "부산 재야 인사 중에서 국회의원 후보를 추천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盧대통령을 정치에 입문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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