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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의 한국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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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화여대는 26일부터 31일까지 열리는「학전」행사의 일환으로「세계 속의 한국」을 주제로 한 학술 대강연회(26·27일)를 가졌다. 이 강연회는 윤태림 박사의 주제강연에 이어 최상수, 심우성, 모윤숙, 이홍구, 이부영 씨 등이 한국의 정신적 위치, 주체적 정신자세를 진지하게 모색하여 주목을 받았다. 「세계 속의 한국」이란 주제강연에 나선 윤태림 박사(연세대)는『지나친 서구화나 편협한 국수주의는 다같이 위험하다』고 전제하고,『개인주의의 바탕 위에 불복종, 저항의 정신자세를 가다듬을 때 세계 속에서의 한국의 위치도 정립 되어갈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다음은 윤 교수의 강연 요지이다.
근래 「한국적인 것」·「우리의 것」이 강조되고 있다. 이는 근대화=서구화라는 착각에의 반작용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화에는 보편성과 특수성이 공존하는 것이라면 어느 한쪽에 치우쳐 생각할 수만은 없다. 모든 문화에는 공통적 보편성과 함께 시간적·공간적 특수성이 있게 마련이다.
한국사회를 돌아본 영국의 「이사벨라· 비셥」은 두 계급으로 나누어 도둑질하는 계급과 도둑맞는 계급으로 이루어진 사회라고 했다. 1895년의 이야기지만, 관리와 민중과의 거리감에서 생기는 한국사회의 부조리를 잘 설명하고 있다. 한국민은 저항을 모르는 국민이다. 일제 말의 징병·징용에 그저 묵묵히 끌려가던 것도 태고로부터의 무의식 속에 스며든 순종과 인내의 소산일지 모른다.
문화사를 통해보면 한국인의 우수성·독창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미국 최후의 이상주의자「윌리엄· 하킹」은『서양보다 훨씬 뛰어난 기독교가 동양에서 일어나게 될 것』이라 예언했는데 이것은 동양사상의 우수성을 말한 것이다. 서양문화의 연원이 되어온 기독교는 동양에서 발생했을 뿐 아니라 성서 속에는 많은 부분을 동양의 사상과 정신이 차지하고있다. 「헤브르」사상·「헬레니즘」문화가 그렇고 십자가의 죽음도 동양의·공무·허 의 개념으로 깊이 있는 이해를 할 수 있다. 「헬레니즘」의 세계관인 높은 교양은 동양의 덕과, 「아라비아」 숫자에서의 「영」은 인도사상의 「공」과 상통한다.
한국민에게 국가의식이 없다는 말을 흔히 위정자들이 한다. 중국민이 가족중심으로, 국가의식이 희박한 것처럼 우리의 경우도 위정자들이 만들어놓은 역사적 소산으로 생긴 현상이다. 정치인이 항상 민중의 착취자로 군림해오면서 국가의식을 강요하는 것은 억지다. 민중에게 국가는 원한의 대상이었지 혜택의 구심점은 되지 못했다.
인간의 역사는 불복종과 저항의 역사에서 시작하고 그 가운데서 성장해왔다.「아담」과 「이브」의 사과, 「프로메테우스」가 훔친 불, 석가· 예수·「갈릴레오」·「마르크스」· 「아인슈타인」·「슈바이처」·「러셀」 등은 「예스」와「노」를 분명히 말한 사람들이다. 「안데르센」동화 속의 『임금님의 새 옷』이야기는 오늘 우리의 현실에도 타당성을 갖는다.
인간의 생활은 상인의 출납부와 같이 계산할 수는 없다.
불건전한 사회에 사는 사람은 자신이 병들어 가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나」즉 자아를 무시당하고도 자신의 정신적 영역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않는다. 「나」를 주장하는 것은 서구의 개인주의 사상의 요체며, 건전한 개인주의로 각자가 개성을 발휘할 때 건전한 국가의식도 싹틀 수 있다. 개성 없는 도구의 위치에서 자족해온 한국민은 동학란, 삼일운동, 4·19 등으로 새로운 의식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나」라는 것은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고 종착역이다. 「나」 인식이 없는 곳에는 정치적으로 노예에 만족하고 문화적으로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꼭두각시다.
우리는 가족·체면·예의에 「나」를 묻어놓고 살아왔다. 묻혀진 「나」를 다시 찾아내어 통제와 획일성을 뚫고 나가는 용감한 자세만이 세계 속에 한국의 좌표를 뚜렷이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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