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90) <적치하의 3개월>(3) <인민 재판>(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김팔봉 씨와 함께 인민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어 그들의 곤봉 세례를 받은 애지사 문선과장 전재홍씨(당시 이름은 영환)도 기적적으로 목숨을 부지했다. 6·25를 통해 그들의 인민 재판에서 사형 받은 피고가 둘 다 살아남은 예는 이 경우밖에는 없었다. 이래서 이들 산 증인을 통해서 공산주의자들의 잔악상이 만천하에 낱낱이 폭로되었고, 또한 수복 후 가해자 일당을 일망타진할 수 있었다. 그때의 인민 재판에서 판·검사 역할을 하던 두 주범은 무기형을 받고 현재도 복역 중이다.
그럼, 이번에는 전재홍씨(현 일요신문 문선부장·47)의 체험담을 들어보기로 하겠다. 김팔봉씨의 증언과 거의 일치하지만, 몇 군데 사소한 대목에서 차이가 있다.
『을지로 3가에 있던 애지사에서는 독립시보(주=여운형 씨의 근민당계 신문)란 신문의 인쇄를 청부맡아 찍고 있었죠.
제법 큰 인쇄소였어요. 6·25가 나고 괴뢰군이 서울에 들어오자 나는 집에 들어앉아 조심하고 있었습니다. 6월 29일인가 출판노조원이란 자들이 찾아와 자기들 노조에 가입하라는 거예요.
나는 세상 돌아가는 것을 좀더 두고볼 생각에서 그들 요청을 거절했지요.

<출판사서 자위대에 잡혀>
그 이튿날 또 왔지만 좋은 말로 돌려보냈습니다. 7월 1일 아침엔 궁금해서 일본 군대 바지와 남방 「샤스」에 밀짚모자를 쓰고 일터인 애지사로 가 보았어요. 텅빈 공장 안을 훑어보고 나오는데 30 전후의. 청년 4명이 나를 보고「잘 만났어, 좀 따라와」라고 위협조로 말해요.
그들의 왼팔에는 「자위대」라는 붉은 글씨의 완장을 달고 있고요. 따라가면서 이유를 물었더니, 아무 대꾸도 안해요. 지금의 남대문극장 뒤쪽의 협진 인쇄소의 구석진 방에 밀어 넣더니만 자물쇠를 채우고 나가버립디다.
「나야 죄지은 것 없으니 별일 없겠지」생각하면서 앉아 있는데, 밤이 되도록 물 한 모금은커녕 들여다보지도 않아요. 밤이 꽤 깊었을 때 애지사 사장인 김팔봉씨가 잡혀 옵디다. 그분보고 「이게 어떻게 된 게냐」고 물었더니「나도 모르겠다」는 거예요. 둘이서 얼굴만 쳐다보다가 날이 새었지요. 아침이 되니까한 녀석이 자물쇠를 풀면서 나오라고 합디다. 방을 나서자마자 나부터 두손을 내밀게 하고 전깃줄로 꽁꽁 묶었오. 그러더니「인민 재판소」라고 쓴 「플래카드」뒤에 두 사람을 따르게 하고, 「부민관」(지금의 국회) 앞에서 재판을 시작하더군요.
협진인쇄소와 부민관까지 사이에서 벌어진 「쇼」는 김팔봉씨가 말한 대로입니다. 인민 재판 장소에는 의자나 책상 같은 것은 없었고, 돌층계 위에 커다란 장작개비가 댓 아름 놓여 있었어요.
일이 이쯤 되니까,「이젠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들고 앞이 캄캄해지더군요.
더욱이 어제 아침에 말없이 집을 나왔기 때문에 처자들은 내가 이 꼴을 당하고 있는 줄도 모를 생각을 하니 답답해 죽을 지경 이예요. 이때 안면이 있는 가수인 이난영(고인) 남인수 (고인)씨 등이 지금의 국회의원 전용 출입구 쪽에서 나를 쳐다봅디다.
그때 국회의사당 안에는 소위「연극 동맹」「가수 동맹」등이 있어 그분들이 출근(?)하다가 본 거예요. 그때 상황으로는 인사 할 수도 없어 내가 외면해 버렸습니다.

<장작개비로 머리부터 난타>
먼저 검사로 소개된 노동운이가 김팔봉 씨를 논고했어요. 검사라는 자가 어찌나 무식한지, 누가 미리 써준 논고문을 들고 나와 읽는데, 한자가 나오면 막혀버려 뒤에 있는 자를 불러서 묻고는 다지 읽곤 합디다. 김팔봉 씨에 대한 논고가 끝나자「길거리의 인민 재판소」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어요. 이때쯤 해서는 길 가던 사람들까지 몰려들어 큰길이 꽉 찼습니다.
이어 검사 노는 나에 대한 논고 문을 읽읍데다. 「전 피고는 많은 선량한 애국자들을 경찰에 밀고하여 투옥했으며, 문선과장으로서 대한민국에 아부했다」고…단 한마디의 심문도 없이 논고가 끝나자, 판사로 소개된 이영기(청구 인쇄소 오프세트 공) 가 「피고들을 인민의 이름으로 사형에 처한다」고 간단하게 일괄 사형 선고를 내립디다. 그러고는 구경꾼을 향해 「피고들의 죄상은 여러 동무들이 알다시피 당장 이 자리에서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죽이되 총알이 아까우니 저 뒤에 있는 장작개비로 쳐죽이자」고 일장열변을 토합디다. 그러나 구경꾼들은 아무 반응도 없이 조용하기만 했어요.
이때 군중 속에 끼여있던 출판노조의 직장단위 선동자들이,「옳소」하고 고함을 치더군요. 이러는, 순간 5, 6명이 장작개비를 들고 머리부터 내리치기 시작했어요. 내 뒤통수는 20㎝가량 갈라졌고, 얼굴도 맞아 입술이 터졌으며, 이마는 10㎝가량 찢어졌어요. 출판노조 산하 각 인쇄소에서 집행위원으로 나온 자들이 장작개비로 몽둥이질을 했는데, 내가 출판계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얼굴과 이름을 다 아는 자들입니다. 나는 곧 정신을 잃었어요. 후에 목격자들 말을 들으니까, 개 패듯 무수히 난타 질을 하더니 축 늘어지니까 「이젠 죽었다」면서 그치더래요. 김팔봉씨와 내가 어찌나 피를 많이 흘렸던지, 4일 후에 큰비가 올 때까지 땅에 검붉게 물들였었대요. 검사 여동운은 다시 두 사형수의 심장을 만져보고 죽음을 확인했답니다.
그러고 나선 손목의 전깃줄을 풀어 발목을 묶고 남대문∼의주로∼서소문동까지 끌고 다녔대요. 서소문에서는 괴뢰군 고급장교가 이런 처참하고 잔인한 꼴을 보고 말리면서 시체는 내무서에 인계하라고 해서 「죽음의 행렬」은 중지 됐다더군요.』

<내무서원이 "시체 찾아가라">
여기서, 전재홍 씨의 증언은 잠시 중단하고, 그가 어떻게 해서 살아났는가를 다룬. 증인으로부터 들어보기로 하겠다.
▲이태신씨(현 명동 「에드」 양복점 경영· 43) 『전재홍씨와는 친척이 됩니다. 전씨의 부인 김영자씨가 찾아와서 남편이 인민재판을 받고 죽었다는데 시체를 찾으러 가자고 해요. 그래서 둘이서 청계천·용산 철로 변의 개천 등을 헤매며 시체를 찾아보았지요.
그때 청계천 등에는 그자들이 죽인 사람들의 시체가 여럿 내버려져 있었습니다. 거기서는 찾지 못하고 있을 때, 7월 5일 아침에 전씨 집에 어떤 내무 서원이 와서 시체를 찾아가라고 해요. 「구루마」한대를 빌어 나와 전씨 부인 등 5명이 지금의 동대문서로 갔습니다. 어떤 서원이 둘만 들어와서 시체를 인수하라고 해요. 그래서 나와 전씨 부인이 유치장 안으로 들어갔지요. 한창 더울 때에 통풍이 잘 안된 데다가 유치장 방마다 죄수(?)들로 가득 차서 숨이 콱 막혀요. 실신해서 쓰러져있는 사람들도 많았고요. 전씨의 시체(?)를 들것에 담아 밖으로 나와서 「구루마」에 실었지요.
이때 어떤 서원이 지금의 종로5가 파출소자리의 반도병원에 가서 사망 확인서를 떼어야 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을 해준다고 일러줍디다. 거적대기로 덮고「구루마」를 끌고 나섰는데, 지금의 한일극장 앞까지 갔을 때 거적 대기 밑에서 가냘픈 신음소리가 한번 들려요. 그것도 나만 들었지, 딴 사람은 못 들었어요. 그땐 「구루마」가 고무바퀴가 아니고 나무바퀴에 쇠판을 씌운 것이었고, 한일극장 앞 인도는 주먹만한 자갈이 깔려있어, 아마 「구루마」의 충격으로 정신이 든 모양이 예요.
반도병원으로 가면 아직 죽지 않은 것이 탄로 날 것 같아 단성사 쪽에 있는 공립병원으로 갔습니다. 수술대 위에 전씨를 올려놓았는데, 의사고 간호원이고 손을 못쓰고 기막힌 표정으로 서 있기만 해요.

<몸에 붙은 구더기 비로 쓸어내>
전씨 부인과 내가 전씨를 엎어놓고 빗자루를 얻어 머리부터 엉덩이까지 하얗게 붙은 구더기를 쓸어냈습니다. 등의 살이 닳고 문드러져 뼈대가 노출돼 있어요. 의사가 수혈을 해야할 텐데 피가 없다는 거예요. 마침 내 피가 같은 A형이어서 주사기로 뽑아. 그대로 전씨 혈관에 찔렀습니다. 수혈의 힘이 그렇게 위대한 줄 몰랐어요. 피가 1백㏄ 쯤 들어가니까. 신음을 시작해요. 5백㏄가 다 들어가니까 신음소리가 더 커지고요. 병원에는 약을 모두 압수 당했다고 해서 동대문 암시장에서 40만 단위의 가루 「페니실린」을 두 병 구해 다 놓아주었습니다. 전씨는 7월 20일에야 의식을 회복했는데, 그 후 6개월 동안은 반 실성 한사람처럼 이따금 헛소리를 하더군요. 』
9·28 수복 후 이때 인민 재판을 꾸민 주모자들은 모두 잡혀 법의 심판을 받았다. 이 대목을 다시 전재홍 씨로부터 들어보면….
『9·28 수복 후 한잠 있다가 지팡이를 짚고 길가에 나섰는데, 계림극장 사장 김갑기씨를 만났어요. 그런데 빤히 보기만 하면서 인사를 안해요. 나는 6·25전까지 부업으로 계림극장 선전부장을 했거든요.
내가 김형하고 불렀더니, 그제 서야 「전형 아니요」하며 두 손을 잡아요. 꼭 죽은 줄만 알았고, 꽤 비슷한 사람도 있구나하고 생각했다는 거예요. 하긴 내 체중이 21관이던 것이 13관으로 줄어들었으니, 몰라볼 법도 하지요. 몇 번 아는 사람한테 이런 변(?)을 당했습니다.

<수복 후 주범들 모두 체포>
52년 4월에 소위 인민재판의 판사 이영기가 미 해병사단 21연대의 노무자로 있다는 정보를 얻어 동대문서 사찰계 강정화 경감(고인)이 수사에 착수, 이를 잡았고 검사 여동운, 현장 선동책 오세용·서 모·김봉룡·김복룡 등 5명도 검거하여 살인 미수죄로 기소됐습니다.
경찰에 잡힌 이와 여 등은 그런 일 없다고 딱 잡아 떼 더래요. 경찰이 증인으로 나를 호출해서 취조실에서 그들과 대면하게 했습니다. 나를 보더니 그 자들은 새파랗게, 질리면서 아니, 당신이 어떻게 살아 있어…」하면서 입을 못 열어요.
이 자들은 그 이듬해 일심에서는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고법까지 올라가서 이와 여는 무기형으로 확정됐고, 나머지들은 10∼15년씩 받았습니다. 현재 이과 여는 복역중이고 나머지 4명은 5∼6년씩 살다가 감형으로 나왔지요.
그때 내가 수사관 앞에서 장작개비 질을 한 자 10여명의 이름을 더 대 줄 수도 있었지만 끝내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그들은 무사했지요. 덩달아 날뛴 사람들이지 진짜 빨갱이는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지금 대한민국에서 다들 잘 살고 있습니다. 』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