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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 받는 노벨 문학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노벨」상이 이제는 세계적인 권위를 굳혔으나 아직 「유럽」 중심의 안배형식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1901년부터 주기 시작한 문학상은 금년까지 66명이 탔지만 비「유럽」인은 「타고르」(인도·1913년) 「가브리엘라·미스트랄」(칠레·45년) 「아그논」(이스라엘·66년) 천단강성(일본·68년) 등 고작 4명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도 「타고르」는 영어, 「미스트랄」은 「스페인」어, 「아그논」은 독일어로 작품활동을 했고 「가와바다」도 「사이덴스티커」 교수 같은 우수한 번역(영역)가의 도움 없이는 수상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른 분야에서도 볼 수 있는 이러한 「유럽」주의는 1895년 11월 27일 「파리」에서 쓴 「알프레드·노벨」의 유언과는 다른 것이다. 「노벨」은 『국적을 초월해서 가장 적격인 자에게만 주라』고 그의 전 유산을 5개의 국제상을 제정하는데 모두 넘겨버렸다.
그러나 1896년 12월 그가 죽은 후 그 유언장의 윤곽이 드러나자 「스톡홀름」의 신문들은 일제히 그를 비애국자라고 비난했고 「스웨덴」 왕까지 큰 액수의 상금이 외국으로 나간다는데 불만을 나타냈다.
그러나 「노벨」의 법률고문들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유언장 내용을 충실히 실천에 옮겼다 ⓛ「노벨」재단은 5인위가 운영, 재산을 관리하며 「노벨」 연구소를 만들어 상의 후보선정을 돕는다.②재단이사장은 「스웨덴」 정부가 임명하고 상위원회는 4인으로 구성하되 물리화학상은 「스웨덴」 과학원, 생리학의학상은 「스톡홀름」의 「카롤린」 연구소가, 문학상은 「스웨덴」 한림원이, 평화상은 「노르웨이」 의회가 선출한 5인위가 결정할 것을 명시했다.
「노벨」의 청을 받아들여 1898년 9월 9일 「스웨덴」 정부는 정식으로 「노벨」상의 제정을 승인했다.
「노벨」 유산의 이자 60%로 분배하는 상금은 한 분야에서 3명 이상에게 줄 수 없다. 상금액이 1개 분야에 보통 4만「달러」 이상인데 세계최고의 업적을 인정받은 수상자에게 돌아가는 상금액이 너무나 적어질 것을 염려해서다.
그러나 수상이 발표될 때마다 특히 <이상주의경향의 가장 중요한 작품>에 주라는 문학상은 해마다 말썽을 빚고있다.
1차대전 후는 미국이 「노벨」상 대량획득공세를 정부지원으로 전개했고 소련에 주는 상은 「숄로호프」를 제외하고는 번번이 정부의 압력을 받았다. 작년의 「새뮤얼·베케트」는 이상주의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그의 작품세계 때문에 「스웨덴」 한림원이 속물이라는 욕을 먹었다. 그래서 내년부터는 수상방식에 대한 비난을 덜고 지금까지 소외된 「아시아」 「아프리카」권이 국제무대에서 증대하는 영향력으로 보아 한 부문 입상자를 최대한(3명)으로 늘릴 것도 고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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