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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상 “채동욱 호위무사로 남겠다” 사의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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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오전까지만 해도 서울 서초동 대검 청사의 겉모습은 평온했다. 마침 휴일이라 주요 간부들 중 상당수가 출근하지 않았다. 13일 ‘혼외자’ 파문에 시달리던 채동욱 검찰총장이 사임을 발표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이튿날 모습치고는 적막할 정도였다.

13일 오후 내내 법무부 김주현 검찰국장은 전국 각 지검·지청장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배경 설명을 하면서 “정제되지 않은 반응이나 말이 외부에 나가지 않도록 해달라”는 취지의 부탁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선 검사들의 반발이 계속될 경우 자칫 검란(檢亂)으로 비화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하지만 물밑에서는 검사들의 반발 기류가 거세지고 있었다.

검찰의 평온함은 14일 오후 2시 김윤상(44·사법연수원 24기) 대검찰청 감찰1과장이 사의를 표명하면서 깨졌다. 김 과장은 이날 검찰 내부 통신망 ‘이프로스’에 올린 글에서 “후배의 소신을 지켜주기 위해 직을 걸 용기는 없었던 못난 장관(※황교안 법무장관을 지칭)과 그나마 마음은 착했던 그를 악마의 길로 유인한 모사꾼들에게 내 행적노트를 넘겨주고 자리를 애원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검찰 지휘체계의 정점인 장관을 향해 격한 논조로 비난을 퍼부은 것이다.

그는 또 “법무부가 대검 감찰본부를 제쳐두고 검사를 감찰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라고 비판했다. 또 “차라리 전설 속의 영웅 채동욱의 호위무사였다는 사실을 긍지로 삼고 살아가는 게 낫다. 아들·딸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물러난다”고도 했다. 김 과장은 서울 출신으로 대원외고,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 법무부 법무심의관실 검사, 법무부 상사법무과장, 서울중앙지검 형사8부장을 거쳐 지난 4월부터 대검 감찰1과장으로 일해 왔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인 2003년 3월 9일 ‘검사와의 대화’에 평검사 대표 중 한 명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당시 강금실 법무부 장관의 검찰 인사 방안에 대해 “갑자기 인사를 서두르는 이유가 뭐냐. 외부와 차단된 곳에서 인사를 짜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오후 4시20분에는 박은재(46·사법연수원 24기) 대검찰청 미래기획단장이 검찰 내부 통신망에 ‘장관님께’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박 단장은 “장관이 이 상황에서 검찰총장 감찰 지시라니 믿어지지 않는다. (중략) 지금 대다수의 국민은 특정 세력이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정권에 밉보인 총장의 사생활을 들춰 흔들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썼다.

이에 앞서 서울서부지검 평검사 40여 명은 14일 새벽까지 회의를 열어 “총장의 중도 사퇴는 재고돼야 한다”는 집단 의견을 표출했다. 이들은 (사퇴가)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이 훼손되는 상황으로 비치는 것에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법무부 장관의) 감찰 지시가 사퇴 압박이 아니라 의혹을 해소하고 조직의 안정을 위한 것이라면 채 총장 사표가 수리되기 전에 의혹의 진상이 밝혀지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평검사들에 이어 중간 간부들도 잇따라 의사 표명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더 큰 반발이 있을 것이라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서울북부지검 평검사들도 일요일인 15일 긴급 회의를 하고 향후 대응 방안을 논의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뿐 아니다. 서울중앙지검을 거쳐 지방에서 근무 중인 한 검사는 “‘검사 집단 사표냐’ ‘간부급 집단 사표냐’를 놓고 물밑에서 논의 중”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검찰 주변에서는 이번 사태가 어떤 단계까지 이어질 것인지에 대해 관심이 모이고 있다. 수도권의 한 부장검사는 “결국은 문제의 혼외자 의혹이 사실인지 여부가 영향을 미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일부 검사들은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분위기라고 한다. 채 총장이 유전자 검사를 받겠다는 입장을 표명했기 때문에 의외로 결론이 빠르게 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하지만 상당수 검사들은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권력 핵심부의 ‘총장 경질 기획설’에 무게를 싣는 분위기다. 채 총장이 취임 후 현 정부의 ‘의사’에 거스르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는 게 근거다. 일부에서는 혼외자 의혹이 불거지기 이전부터 권력 핵심부가 채 총장 사퇴 압력을 넣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특수통 평검사는 “의혹이 사실이라면 총장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동기 자체가 너무 불순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국정원 같은 곳에서 자신들의 정보를 가지고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내보낼 수 있다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눈에 띄는 것은 검찰 내부에서도 미묘한 입장 차이가 감지된다는 점이다. 대검찰청과 서울중앙지검이 있는 서초동 검사와, 법무부가 있는 과천시 검사들 사이에 채 총장 사태와 관련해 시선이 엇갈린다는 얘기다.
법무부 소속의 한 평검사는 “원래는 법무부는 법무부 소속 검사만 감찰해왔기 때문에 이례적인 건 사실이다. 윗분들 결정이겠지만 이런 상황에 한숨만 나온다. 이제 검사가 같은 검사가 아니다. 서초동 바라보는 검사, 과천 바라보는 검사로 분열될 걸 생각하니 괴롭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가 검찰과 권력 사이는 물론, 검찰 내부의 알력 등 해묵은 난제의 심장부를 겨누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13일 채 총장의 사퇴 발표 후 중앙지검 3차장 산하 수석·차석 검사 일부가 회의를 했다. 참석했던 한 검사는 “앞으로 조직의 미래는 어찌 될지 눈앞이 캄캄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참기 힘든 상황이 될 것 같다. 물러난 총장이 누구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검찰을 이런 식으로 다룰 수 있다는 생각을 용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승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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