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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물의 우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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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1면

문명과 약물과는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진시황이 구한 불사약이나 육신의 고통을 덜어 주는 아편 같은 것은 이를테면 고전적인 필(Pill)이다. 이에 대해서 불도를 통해서, 또는 고행과 치욕을 통해서, 세속과 자아로부터의 해탈을 얻고, 황홀한 희열경(ecstasy)에 잠기려던 인류의 희구를, 그것 없이도 거뜬히 해결해 줄 수 있는-또는 있다고 믿는-LSD(환각제)는 현대판 필.
고전적인 필과 현대판 필이 함께 하는 특징은 그것이 모두 인간의 허약에 바탕을 두고있다는 것이고, 인간이 발견해 낸 필이 치고, 아무런 부작용 없이 인간의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켜 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데 우수의 근원이 있다는 것이다.
불로초·아편·LSD 따위는 그렇다 치고, 그 무수한 강장제나 비타민제, 그리고 피임제·진통제·등은 또 어떤가. 이런 종류의 필이 더없이 안타까운 것은, 이학이 그 유효성을 입증해 주는 듯이 보인다는 점이다. 그런 약물을 만들어서 파는 사람들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선전수단을 총동원해서, 저마다 만들어 내는 물건의 신령한 효능을 과학적 자아근(전문어)으로 떠벌린다. 그러나 요란스런 시·엠 뒤에는 거의 예외 없이 보다 더 과학적인 위험경고가 따르기 마련이다. 필의 위험은 이중이다.
하나는 도덕적인 위험이고, 다른 하나는 생리학적 위험이다. 시카고의 어떤 박사 말에 의하면, 아스피린을 먹고서도 내출혈을 일으켜서 죽는 수가 있다고 했다. 또 앞으로 2, 3년 있으면 무통 낙태약이 나온다는 소문도 있지만, 생식과 관련 있는 모든 약물은 좌절감과 부단한 불안을 휘몰아와서 결국 도덕적인 의식을 마비시키고 태아와 산모를 한꺼번에 불구화 하는 위험을 수반한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나 있다.
정성껏, 온갖 과학적인 자료를 총동원하다 시피하여, 애써 만든 필이 그렇다. 하물며 돈벌기에 혈안이 되어 되는대로 만들어서 팔아 넘기는 약 아닌 약의 경우야 어떻겠느냐. 최근 우리나라의 몇몇 제약회사에서 만든 안약이 말썽이 되고 있다. 비단 이 안약들뿐만 아니라 제약업자들과 약장수들이 무제한의 자유를 누리는 가운데 마구 약을 만들어 내는 한국은 가위 필의 왕국이다. 남들은 잘 만든 약을 의사의 처방과 감독 하에서만 사서 쓸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우리는 동네 약방에서 살 수 없는 약이 없고, 주사까지 맞을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가.
다만 그래서 인생이 더 우울해 진다는데 탈이 있다. 필의 왕국은 우수의 왕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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