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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해방에서 환국까지-정신적 고초로 인한 뇌혈전증 명의들의 진력에도 호전 안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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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동경 성로가 병원장의 말을 들으면 영친왕의 명세는 고혈압으로 인한 뇌혈전증으로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으며 말조차 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그 전날까지만 해도 약간 정신이 명료해서 『특사는 언제 오느냐? 특사는 언제 오느냐?』고 자꾸 물으셨다는데 정작 내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아는지 모르는지 다만 반가운 표정으로 입 언저리에 엷은 미소를 지을 뿐 아무말씀이 없으셨다.
영친왕은 육군 유년학교부터 육·군 대학에 이르기까지 직업군인으로서의 훈련을 받았으며 거의 일생을 군부에 종사해온 만큼 신체만은 남유달리 강건한 편이었는데 갑자기 그와 같은 중병에 걸리게 된 것은 해방 후 격동하는 시기에 일찌기 경험한 일이 없던 여러 가지 곤란한 문제에 당면하여 밥에 잠도 잘못 자는 날이 여러 날 계속된 결과 신경이 극도로 쇠약해진 때문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렇지만 이제는 박 의장의 호의로 일본에서 제일 가는 병원에 입원을 하게되고 성로가병원의 고명환 의사는 물론이요 일본의 국수라는 순천당병원의 좌등 박사까지 일부러 출장하여 치료에 전력하고 있으므로 혹시나 하는 희망을 걸었었으나 병세는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나와 함께 「특사」가 된 엄주명씨는 내가 도착한지 꼭 2주일 후에 동경에 왔는데 그는 영친왕이 누워 계신 병실로 들어오자마자 수척해진 영친왕의 두 손을 붙들고 눈물이 샘 솟듯하여 말조차 잘 하지를 못하였다.
외사촌이자 단 한 사람뿐인 죽마고우인 엄주명씨는 영친왕이 63년전에 볼모로 일본에 끌려갈 때 말동무로 따라갔으며 해방 후 20여년 만에 처음으로 그나마 중병에 걸린 고우를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눈물이 나지 않으리요?
1905년 을사보호조약 당시 지금 대법원자리 앞에서 살았다는 엄주명씨는 일가가 배일파라고 해서 덕수궁출입이 금지되었는데도 구름다리를 타고 몰래 넘어 들어가 소꿉장난을 하며 놀았다고 한다.
그것은 1908년 섣달이었다. 엄주명씨가 덕수궁 앞에서 이발을 하고 나오는데 대한문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옆 사람더러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니 뜻밖에도 영친왕이 내일 일본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대한문 왼쪽기둥에 기대어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마차가 나오는데 다행하게도 그 안에 탄 영친왕과 엄씨의 두 어린 눈이 마주쳤다.
그날 밤 악선제로부터 엄주명씨 집에 전화가 왔다. 이등박문한테서도 허락을 받았으니 내일 곧 영친왕을 따라서 일본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영친왕이 일본으로 떠나던 날 아침은 몹시 추웠었다. 수행원은 궁내대신 이윤용 (이완용의 백씨)과 송병준, 조동윤 등 3명의 대신과 조대호, 서병갑, 증아 만(일본인) 등 학우 4명을 합해서 모두 15명이었다.
영친왕 일행은 인천까지 마차로 가서 일본군함 만주환으로 일본으로 향하였는데 동경 역두에는 일본 황태자도 나오고 겉치레로는 환영이 대단하였다. 이 날밤 영친왕은 목욕탕에서 처음으로 엄씨의 손을 꽉 잡았다.
『귀성아 (엄주명씨의 아명), 너 어머니 보고싶지 않니?』하면서 목욕탕 속에서 엉엉 울었다는 것이다.
엄주명씨는 그와 같은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으면서 영친왕의 손목을 붙들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울음보를 다시 한번 터뜨린 것이었다.
영친왕이 동경의 동쪽 성로가병원에 입원했을 당시 덕혜옹주는 동경의 서쪽 「마쓰사와」(송택)병원에 불치의 정신병자로 벌써 10수년 동안이나 누워있었으니 운명의 장난으로는 너무나 악착한 것이었다.
「마쓰사와」병원은 일본서도 가장 유명한 정신병 전문병원인데 당시 그 병원의 원장으로 있던 「하야시」(임장)박사는 이 불운의 한국왕녀를 동정하여 극진히 치료해 주었었다.
덕혜옹주는 강제로 정략결혼을 한 대마도의 「소오」(종)백작과는 이혼한지 이미 오래이므로 매월 1만2천 원의 입원비는 영친왕이 가엾은 누이동생을 위해 꼬박꼬박 지불 해주었지만 아무 꺼릴 것이 없게된 덕혜옹주가 혼자서 쓸쓸히 일본에서 죽을 까닭은 없으므로 나는「마쓰사와」병원으로 문병할 때마다 『영친왕도 영친왕이지만, 덕혜옹주야 말로 하루바삐 귀국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깊이 하였던 것이다. <계속> 【김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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