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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과 문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아슬아슬하게 기어오르던 초미니가 어느 사이에 미디니 맥시란 새모드로 바뀐다는 얘기이다. 유행의 원천인 유럽과 미국에서 비롯되었고 이웃 일본에서 한참 유행한다니 뒤져서는 체면문제란 것이다. 뒤질세라 이 땅에도 미디와 맥시가 상륙했으니 문명사회의 체통은 그런대로 지킨 셈일까.
얼마전 더벅머리에 대한 단발령이 내려 때아닌 진풍경을 구경했다. 또 초미니양을 치재에서 다스렸다는 뉴스도 들었다. 그 초미니양의 소감이 일품이다. 좀 짧은듯 했지만 앞으로 유행을 따라 미니를 벗을 수는 없다고 우선 솔직한 답변이라고 웃어넘길 수 밖에 없다.
유행이란 어느 누구도 쉽사리 막기는 어렵다 .쉽게 순응할 수는 있어도 말이다. 굳이 유행을 막지 않더라도 그것은 스스로 명멸하는 존재다. 순간에 만연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괴물이 바로 유행이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생활과 밀착된 것이라면 자연스럽게 문화적 유산으로 뻗어갈 수도 있다.
문제는 어떤 유행이 얼마큼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고 실리를 줄 수 있는가하는 척도가 중요하다. 미니보다 미디가 더 좋고 맥시가 더욱 아름다운 것인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각설하고 오늘은 매스컴의 시대요, 매커니즘의 시대다. 이제 우리도 근대화니 고속시대니 하는 이른바 도약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인공위성이니 컴퓨터니 하는 엄청난 문물을 제쳐놓고라도 상당한 기계문명을 누리고 있다.
빽빽이 들어선 고층건물들과 함께 시민 아파트요, 중산 아파트하며 맨션·아파트란 단지주택들이 같은 모양으로 치솟고 있다. 틀에 박은 듯한 아파트 속에 살면서 쌀 대신 슈퍼·마키트에서 사온 인스턴트식품을 즐기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같은 유행의 옷을 입기를 즐겨한다. 또 그들의 취미와 화제도 같은 것으로 집약된다. 어느 가수와 탤런트를 좋아하고 어떤 TV프로가 재미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같은 우리들의 획일성과 동조성은 전근대적인 유산이 아니었던가. 모든 인간이 같은 생각을 하면서 같은 감성을 지니고 똑같은 행동을 한다는 것은 미개사회의 생활양식이었을 것이다.
오늘의 우리가 획일성과 동조성에 깊숙이 물들어 가는 것은 매스컴과 메커니즘의 절대적인 영향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어쨌든 이 같은 물결은 외래문명을 재빨리 보급하고 선진국을 뒤쫓아 갈 수 있다는 데서 유해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생활풍토에 어울리지 않는 유행과 문명을 맹목적으로 추종해간다는 것은 얼빠진 로보트다. 생생한 이 땅에 알맞는 창조적 유행은 마련될 수 없을까. [윤병로(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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