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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지 않은 이 세상 있는 그대로 그립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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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영국 출신의 악동 미술가 듀오 채프먼 형제의 ‘No Woman No Cry’(부분). 2009.

유리박스 안에 모셔진 좌대(座臺) 위엔 손가락만한 사람 모형이 가득 쌓여 있다. 신체가 함부로 절단된 시신더미다. 전쟁터의 한복판 같은 대량 살육 현장의 한구석엔 이젤을 놓고 그림 그리는 이가 있다. 잔뜩 멋 부린 수염이 그가 누구인지 말해준다. 아돌프 히틀러다.

 히틀러의 캔버스에는 이곳 풍경과는 상관없이, 피카소 흉내를 낸 인물화가 그려져 있다. 왜 굳이 이런 곳에서 예술가의 제스처를 취하는 걸까 싶을만 큼 현장과 동떨어진 그림이다. ‘현대미술의 악동’ 채프먼 형제가 만든 지옥도다. 제목은 레게 음악가 밥 말리의 노래에서 따온 ‘No Woman No Cry(여인이여 울지 마오)’.

 영국 출신의 미술 2인조 디노스(51)·제이크(47) 채프먼 형제가 서울 청담동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 국내 첫 개인전을 열고 있다. 2002년부터 최근까지 작업한 회화·조각·드로잉 등 45점이 나왔다. 전쟁·대량학살·죽음·소비지상주의 등 가볍지 않은 주제를 엽기적으로 다뤘다. 사뭇 위악적인 이런 작품들로 형제는 ‘yBa(young British artists)’의 일원으로 떠올랐다. 1980년대 후반부터 영국 현대미술의 부흥기를 주도한 일군의 신예를 이르는 말이다.

 전시 제목 ‘이성의 잠’은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의 대표작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에서 따왔다. “인간의 잔혹함과 세계를 부조리를 거의 처음으로 직시한 화가”라며 고야를 가장 존경한다는 이들이다.

 그러니 히틀러가 있는 지옥도가 비꼬는 것은 재능 없는 예술가 히틀러만이 아니다. 형제는 “파리 몽마르트르의 성당 건너편에서 그림 그리는 화가를 본 적이 있다. 차가 많이 지나다니는 혼잡한 그곳에서 그는 차 한 대도 그리지 않더라. 성당의 아름다움만 그리겠다는 신념을 가졌을 거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고 했다.

 불편한 작품을 통해 이들이 전하는 불편한 진실은 이런 거다. “폭력과 이기심이 세상의 진실에 더 가깝다. 아름답지 않은 세상을 미화하고 긍정적 부분만 부각시키는 게 오히려 거짓된 작업이다.”

 전시는 12월 7일까지. 무료. 02-3448-0100.

글·사진=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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