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4)한용운저 『님의 침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만해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은 소설 같은 아기자기한 재미는 없다. 첫머리의 군말로부터 독자에게라는 후기에 이르기까지 이 시집 전체가 잃어버린 조국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일관된 연작시인 만큼 언뜻 보면 다른 시집에 비해서 단조롭다는 느낌조차 받기가 쉬울 것이다.
[님은 갔읍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읍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참아 떨치고 갔읍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려 갔읍니다….]
전편이 이렇게 한 가락의 푸념이어서 그냥 아무렇게나 술술 읽어가면 뭐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분이, 67년이라는 한 평생을 어떻게 살다가 간 사람이냐 하는 것을 미리 알고, 이 시집을 대하면 그 분의 조국에 향한 일편단심과 절절한 애정이 구구절절 가슴 깊게 사무쳐 올 것이다.
1879년생. 최남선보다 열 한살이나 위고 이광수보다 열 세살 위가 된다. 살아 생전에 문인 행세라는 것을 해본 일이 없고, 따라서 당시의 문단이라는 곳과도 별 인연이 없었다. 문인이고 문단이고 의식할 틈이 없이, 그 분의 한 평생은 외오라지 일제에 대한 증오와 잃어버린 조국에 향한 집념 그것뿐이었다.
우리민족이 처해있던 그 시대의 가장 분명한 중심을 티끌만큼도 눈길이 흐려지는 일이 없이 곧게 살아낸 사람이다. 그러기 일제말 1940년대에 이 땅의 선량이라는 사람들의 거의 태반이 하나하나 차례차례로 일제의 마수에 휘어들 때도, 그 분만은 마지막까지 정절을 굽히지 않았다. 생활은 어렵고 집 한간 변변히 없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도 독립운동가이던 김동삼이 서대문 감옥에서 죽어 나왔을 때는 제일 먼저 달려가서 그를 자택으로 운반, 스스로 장사를 지내 주었던 것이다. 이 무렵의 조국은 한용운의 이러한 거취로만 그 아슬아슬한 명맥을 잇고 있었던 셈이다. 그의 한 평생은 끝까지 투쟁 그것이었다.
한용운의 그렇게 살다가간 한 평생을 오늘의 우리가 아픔으로써 느낄 줄 안다면, 그의 이 시는 우리를 일깨우는 칼끝이 된다.
[당신이 가실 때에 나는 다른 시골에 병들어 누워서 이별의 키스도 못하였읍니다.
그때는 가을바람이 첨으로 나서 단풍이 한 가지에 두서너 잎이 붉었읍니다.
나는 영원의 시간에서 당신 가신 때를 끊어 내겠읍니다. 그러면 시간은 두 토막이 아닙니다.
시간의 한끝은 당신이 가지고 한끝은 내가 가졌다가 당신의 손과 나의 손과 마주 잡을 때에 가만히 이어 놓겠습니다.]
그렇게 이어지기 1년 전, 1944년5월에 그분은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이 시집은 그분의 평생을 아울러 염두에 두면서 차근차근 읽어야만 깊은 맛이 우러나오는 그런 시집이다. [이호철(작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