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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님은 거북하시거든요!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39호 30면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거나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전화벨이 울려 하던 일을 멈추고 황급히 달려가 전화를 받은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무슨 중요한 연락이 아닐까 싶어 물을 뚝뚝 흘리며 달려가 받았는데,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안녕하세요. 고객님”이다. 부동산투자업체나 보험사 혹은 카드사의 판촉전화가 대부분인데, 솔직히 다른 일 하다가 이런 전화를 받으면 엄청 짜증이 난다. 당연히 가는 말이 고울 리 없다. 다소 쌀쌀한 목소리로 “그런 거 안 하겠습니다”라든가 “저는 해당사항 없는 것 같은데요” 하고 전화를 끊곤 한다.

 그런데 얼마 전 TV에서 하루 종일 고객을 상대로 일하는 감정노동자들의 고충을 다룬 프로그램을 보고 마음을 바꾸었다. 하루에 수백 통씩 전화를 하다 보면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나게 되는데, 그중에는 나처럼 그냥 쌀쌀하게 끊는 사람도 있지만(이런 경우도 전화 거는 입장에서는 무척 기분이 나쁠 것이다) 아예 대놓고 욕을 하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엄청난 모욕감을 느낀다는 얘기를 듣고 가슴이 뜨끔했다. 그래서 요즘은 최대한 부드럽게 전화를 받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런 나의 결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전화가 있다. 무생물인 상품에 대해 종횡무진으로 존댓말을 구사하는 전화다.

 “고객님. 저희 회사에서 이번에 ××카드가 처음 나오셨는데요, 이 카드는 현금서비스 ×백만원에다 매번 사용하실 때마다 몇 퍼센트씩 적립이 되시는 아주 편리한 카드이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끝도 없이 계속되는 존칭 종결어미를 듣다 보면 스트레스가 머리끝까지 올라온다.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끊어버린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식의 어법에 맞지 않는 존댓말이 소위 ‘고객님’을 대상으로 구사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쩌다 가끔 그랬기 때문에 웃어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 정도가 너무 심해 인내심의 한계를 느낄 때가 많다.

 “고객님, 이 제품은 색깔이 정말 예쁘게 나오셨어요.”
 “고객님, 저희 홈페이지에 들어가시면 팝업창이 뜨시거든요.”
 “고객님, 화장실은 저쪽에 계십니다.”
 “고객님, 거스름돈 1350원. 여기 계십니다.”

 누가 직원들에게 이런 식의, 어법에 맞지 않는 존댓말을 하도록 교육시켰는지 모르겠다. 고객을 왕처럼 모셔야 한다는 치열한 서비스 정신이 이런 부작용을 만들어냈을까. 솔직히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대접받는다는 느낌은커녕 몹시 어색하고 불편하다는 생각만 든다. 매장 입구에 서서 마치 자동인형처럼 똑같은 동작으로 “반갑습니다, 고객님”을 외치는 직원들의 인사를 받을 때도 같은 기분이다. 무언가 알맹이가 빠진 것 같은, 내용은 없고 형식만 과도하게 부풀려진 기계적 획일주의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몇 년 전 114 안내원이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고 하는 것을 듣고 몹시 놀랐던 기억이 난다. 세상에 얼굴도 모르는 불특정 다수를 향해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라고 하다니. 그런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사람의 멘털리티가 궁금했다.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모두 그것이 공허한 립 서비스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런 공허한 말들이 난무한다. 고객을 잘 모셔야 한다는 미명하에 굴종을 강요하고, 웃음을 강요하고, 존칭을 강요한다. 급기야는 인간의 가장 소중한 영역, 가장 내밀한 영역인 감정까지 강요한다.

 이런 과도한 외형의 확장은 어쩌면 그 안에 내용이 없기 때문에 생긴 부작용인지도 모른다. 직원과 고객 사이에 진정으로 인간적 신뢰가 쌓인다면 굳이 그렇게 과도하게 “고객님, 존경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고객 역시 물건에까지 존칭을 붙이는 공대를 받지 않아도 충분히 고객으로서 마땅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형식적인 서비스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적인 노동환경이다. 고객을 가장한 감시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친절 점수’를 매기는 상황에서 감정노동자들은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을 과도한 존댓말로 메우고 있다. 어제 점심, 백화점 식당가의 한 중식당에서 굴짬뽕을 시켰다. 그때 돌아오는 직원의 대답이 또다시 이 ‘고객님’의 심기를 건드린다.

 “굴짬뽕은 안 되십니다. 오늘 굴이 안 들어오셨거든요.”



진회숙 서울시향 월간지 SPO의 편집장을 지냈다. 서울시향 콘써트 미리공부하기 등에서 클래식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클래식 오딧세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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