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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에 말린 새끼 참돔 쫄깃한 부드러움 담백한 짠맛 일품이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크기가 작은 갈치들도 건어가 된다

유난히도 길고 무더운 여름이었다. 여름이면, 그리고 조금만 태양이 뜨거워지면 으레 ‘유례없는 폭염’과 ‘100년 만의 무더위’라는 말을 마치 관용구처럼 아무 감흥 없이 쓰곤 했지만, 지난여름은 정말 어떤 수식도 모자랄 정도였다. 그 어느 때보다 기온이 높았고 그 어느 때보다 비가 내리지 않았으며,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적조로 인한 피해가 컸다. 그래도 이제는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소름을 불러일으킬 정도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잘 ‘익은’ 건어를 만날 시기가 됐다.

살은 단단해지고 맛은 농축 ‘업그레이드’
건어. 말 그대로 말린 생선이다. 다만 흔히 알고 있는 말린 생선인 북어나 굴비와는 다르다. 물론 북어와 굴비 역시 명태와 조기를 말려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이곳의 건어들은 명태가 북어로, 그리고 조기가 굴비로 변화하는 과정보다 간단히 또 다른 맛을 갖게 된다. 게다가 원체 잡히는 어종이 다양하다 보니 흔히 알고 있는 가자미 외에도 참 많은 것들이 건어로 팔리고 있다. 그리고 나와 아내는 그중 새끼 참돔을 말린 것을 가장 좋아한다.

겨우 손바닥만 한 크기이지만 그 생김새는 분명히 참돔인, 그리고 여전히 선홍빛이 비늘에 묻어 있는 건어를 봤을 때는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처음 보는 것들은 우선 먹어봐야 한다는 신조에 따라 구입을 했는데, 3만원에 예닐곱 마리밖에는 살 수가 없었다. 만만찮은 가격이었다.

하지만 그 맛은 지갑에서 얼마만큼의 지폐가 끌려 나왔는지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릴 정도였다. 흰살 생선답게 담백하고 조신한 맛이 일품이었던 게다. 비리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밍밍하지도 않았다. 탄력이 살아있는 육질은 씹는 즐거움까지 선사했다. 딱 적당한 정도의 맛과 식감이었다. 아마 생물이었으면 그 정도로 큰 감흥이 일지 않았을 것이다. 생선을 소금에 절여 말리는 과정에서 살이 단단해지고 맛이 농축되기 때문에 단 한 조각만으로도 깊은 감칠맛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런 ‘맛의 결정체’의 크기가 작다 보니 딱 한 끼만 먹을 수 있는 양만큼 굽는 것도 수월했다. 그리고 8월을 보내는 마지막 주에, 나는 여름 내내 땀을 빼느라 수고한 내 몸을 치하하기 위해 오랜만에 건어를 사기로 했다.

중앙시장에서 건조되고 있는 건어들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활어 골목 옆에 위치하고 있는 건어물 골목에 접어들자 내 눈은 바쁘게 움직였다. 그 뜨거운 태양이 어떤 생선들을 먹기 좋게 만들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가자미. 두께가 얇고 발라먹기가 좋아 건어용으로는 그만이다. 일 년 내내 팔리긴 하지만, 한겨울에 잡히는, 알이 잔뜩 들어 있는 참가자미 외에는 원양산이라 제외.

이어 시선이 머문 것은 장어였다. 통영은 바닷장어가 많이 잡히는 곳인데, 그렇게 흔하다 보니 껍질을 벗겨 살만 말려 팔곤 한다. 그렇게 꾸득꾸득한 건어가 된 장어는 보통 쪄서 먹는다는데, 아직 그런 ‘하드코어’한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으니 이 역시 패스.

몸집이 크고 살이 두꺼운 민어조기들 역시 많이 보였지만, 단 두 식구가 먹기에는 그 한 마리도 너무 컸다. 민어조기를 무척이나 좋아하시는 어머니와 외가 식구들이 떠오르긴 했지만 돌아오는 명절을 위해 참기로 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그 작은 참돔이 보이질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 건어를 팔고 있던 한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가자미처럼 얇은 생선들은 소금물로 염장을 한다

“새끼 도미 말린 건 없나 봐요?”
“없지.”
“그럼 언제 나와요?”
“거야 잡히야 나오지.”
“어, 그거 양식장에서 갖고 오는 거 아니었어요?”
“양식장에서야 크게 키워야 카는데 그래 작은 거 출하하겠나?”
아하, 난 그동안 그 작은 참돔들이, 양식장에서 도태된 것들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럼 그게 다 자연산이었던 거예요?”
“그러니 언제 나오는지 모르는 기다. 그나마 계울(겨울) 되마 쫌 흔하지 지금은 안 보인다.”
그 얘기를 듣자 나는 오히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말린 새끼 참돔을 먹어야겠다는 의지가 확고해졌다. 그래서 이번엔 차를 몰아 서호시장으로 향했다. 중앙시장보다 건어의 종류가 더 많은 곳이다. 하지만 거기에도 말린 새끼 참돔은 없었다. 이번에도 건어 가게 아주머니를 붙잡고 물었다.

“그 왜, 새끼 참돔 말린 거는 없어요?”
“뭐 할라꼬요? 묵게 찍게?”
아주머니는 내 손에 들린 커다란 카메라를 힐끗 쳐다봤다.

“먹으려고 그러죠.”
가려지지 않을 게 뻔하지만, 난 카메라를 뒤춤으로 숨겼다.

“마리에 오천원인데. 그나마도 지금은 냉동실에 있고.”
갈등이 일었다. 마음을 정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을 벌기 위해 아주머니를 잠깐 붙잡았다.

“여기 있는 건어들은 전부 여기서 말리는 거예요?”
“시장 입구에 식당들 쭉 있다 안 합니꺼. 그 옥상에서 말립니다.”
“그럼 말리기 전에 소금간도 하시겠네요.”
“그럼요. 민어조기나 도미처럼 크고 살이 두꺼운 기는 소금을 쳐가 간을 배게 하는데, 내다 말리기 전에는 소금을 다 씻치내야 하거든요. 다라이에다 물 받아놓고 큰 고기들 씻치고 나모 거다 가자미나 서대같이 얇은 것들 넣어서 간을 하는 기지요.”

이것 역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어종에 따라 필요한 소금의 양이 다른데, 이를 굉장히 효율적인 방법으로 처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더 놀라운 건, 요즘 같은 시기에는 두툼한 민어조기가 마르는 데에 고작 반나절밖에 안 걸린다는 사실. 건조 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건어의 맛이 좋아지는 것은 당연지사. 지금은 비록 냉동실에서 여름을 나고 있지만, 그 도미 역시 바로 이 통영 근해에서 잡혀 통영의 시장에서 손질한 후 통영의 태양 아래 말렸을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사야지 별 도리가 없다.

그렇게 사온 도미는, 조금 짜긴 했지만, 정말 오랜만에 생선을 먹는 즐거움을 되살려주었다. 짜면서도 담백한 모순된 맛,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한 이중적인 식감 덕분에 나와 아내는 꽤나 기분 좋게 저녁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물론 겨울이면 좀 더 신선한 건어들이 나올 거라는 기대는 여전하지만 말이다.

통영 글·사진 정환정 『남해 밥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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