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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연·지연에 묶인 집단 이성 마비 … 강력한 反부패 입법을”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1. 건설현장식당(속칭 함바)과 관련한 사기 혐의로 유모(67)씨가 붙잡힌 것은 지난달 22일. 전국에 수백 개의 함바를 운영하며 뇌물 비리를 일삼던 유씨가 2011년 구속됐을 때는 강희락 전 경찰청장이 옷을 벗는 등 큰 파장이 일었다. 그런 유씨가 구속 집행정지 기간 중에 예전과 비슷한 범죄를 저지른 데 대해 ‘경찰 외에 검찰, 정치인, 지난 정권 실세가 연루됐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돈다.

#2. 부산지검의 원전비리 수사가 5일로 100일이 됐다. 처음에는 일부 원전에 납품된 케이블의 ‘시험성적서 위조 사건’이었지만 지난 정권 실력자와 원전 관련 기업들이 모두 얽힌 대규모 비리 사건이 됐다. 이 과정에도 어김없이 ‘브로커’가 등장한다. 원전 납품업체 H사와 지난 정부의 권력 실세 ‘영포라인(영일·포항 출신)’을 연결해 준 이는 H사 부회장 직함을 달았던 오모(55·구속)씨. ‘실세와 연결해 주겠다’며 회사 돈 13억원을 받아 낸 오씨는 국정원 간부 출신인 윤모(57·구속)씨에게 돈을 건네며 당시 지식경제부 장관에 대한 로비를 부탁했다.

한국 사회에서 ‘게이트’로 불릴 만한 대형 비리 사건에는 ‘브로커’가 빠지지 않는다. 불법 브로커들의 행태가 불거질 때마다 정부와 공공기관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진다. 국제적인 부패 조사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일시적인 적발과 수사만 반복될 뿐 근본적인 대안으로는 좀체 나아가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아시아 선진국 중 부패 상황 최악” 평가도
브로커 비리는 ‘한국 특유의 문화’라고까지 할 수 있다. 권력형 비리와 연결된 ‘거물’ 외에도 사회 곳곳에 ‘브로커’ 없는 곳이 없을 정도다. 법조·사건 브로커, 환자 알선이나 외국인 의료관광객 유치를 하는 의료 브로커, 외국인 노동자 취업 알선 브로커, 부동산 감정 브로커 등 새로운 형태가 계속 생긴다.

전북대 설동훈(사회학) 교수는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브로커가 연계된 대형 비리 사건이 터지는 건 우연이 아니다. 갑자기 불거진 게 아니라 우리 사회에 늘 잠재해 있던 문제가 정권이 바뀌는 과정에서 드러났을 뿐이다”고 말했다.

문화적 전통과 맞닿아 있다고 설명하는 전문가도 많다. 친밀한 소(小)공동체로 똘똘 뭉쳐 서로 돌봐 주고 힘을 합쳐 외부에 저항하던 전통이 변형됐다는 얘기다. 친분이 얽히면 ‘우리는 하나다’ 식의 무리의식이 일어나 이성적으로 학습한 윤리의식에서 멀어진다는 것이다.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윤대현(신경정신과) 교수는 “정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는 학연·지연만으로도 쉽게 법률 같은 사회적 통제를 벗어나는 사람이 많다. 집단적인 이성 마비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건국대 한상희(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 번 비리가 발생하면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발본색원해야 하는데, 뿌리를 뽑지 못했던 게 근본 원인”이라고 말했다.

“한국 사회는 구조적 부패 관행으로 위험 수준이다.” 4일 정부 서울청사에서 안전행정부 간부들을 상대로 특강을 한 이성보 국민권익위원장의 말이다. 한국 부패방지기구의 수장이 직접 심각성을 호소할 만큼 우리나라 부패 관련 지수는 악화일로다. 각종 통계가 이를 뒷받침한다.

한국투명성기구에 따르면 세계투명성기구가 매년 발표하는 부패인식지수(CPI·Corruption Perceptions Index)의 우리나라 순위가 몇 년 전부터 하락 추세를 보이고 있다. 2011년 세계 43위에서 지난해 45위로 떨어졌는데, 12월 발표될 올해 순위는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투명성기구의 CPI는 전 세계 여러 기관이 독립적으로 발표하는 13개의 부패 관련 지수를 모아 서열을 매긴다. 13개 지수 중 먼저 발표되는 것들마다 한국의 순위가 떨어지고 있다.

홍콩의 리서치기관인 정치·경제 리스크 컨설팅사(PERC·Political and Economic Risk Consultancy)가 매년 발표하는 아시아 주요 국가의 부패 관련 보고서도 이런 지수 중 하나다. 3월 발표에서 한국의 순위는 태국·중국과 비슷했다. PERC 리포트는 아예 ‘아시아 선진국 중 한국의 부패 상황이 가장 심하다’고 단언했다. 6일 발표된 세계경제포럼(WEF) 국가경쟁력 지수의 부패 관련 내용도 마찬가지로 순위가 계속 떨어지고 있다.

국민 눈높이 맞춰 법·제도 바꿔야
그러나 우리나라 국민의 부패에 대한 ‘눈높이’는 높아지고 있다. 홍콩 PERC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들의 부패에 대한 관대함 정도를 보여 주는 지수는 3.98(10점 만점, 클수록 부패)이다. 실제 한국의 부패지수(6.98)보다 훨씬 엄격하다. 국민의 눈높이에 정부와 기업이 못 따라간다는 얘기다.

하지만 시민사회의 요구에 맞는 근본적인 대안 마련은 아직 멀다. 국민권익위는 2012년 ‘부정 청탁 및 이해충돌 방지법안’을 발의했다. 당시 권익위원장이던 김영란(서강대 석좌교수) 전 대법관의 이름을 따 ‘김영란법’으로도 불렸다. 원안은 ▶광범위한 청탁금지조항 ▶뇌물과 직무 행위 간에 ‘대가성’ 입증조항 제외 등 강력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7월 정부에서 의결한 법안은 상당수 조항이 후퇴했다. 그나마 국회에서 제때 통과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국민권익위 박계옥 부패방지국장은 “올해 안에 상임위와 법안심사 소위 등을 모두 거치는 걸 목표로 하고 있지만 아직 자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일부는 시장의 합리적 운영을 가능케 하는 브로커 본연의 기능을 살리기 위해 로비스트 합법화를 논의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부패 관행을 뿌리 뽑을 강력한 입법과 사회인식 개선이 먼저라는 주장도 많다. 한상희 건국대 교수는 “불법 브로커가 여전하다면 합법적 로비스트가 설 자리 자체가 없다. 정·관·재계로 이어지는 부패 관행을 엄벌할 수 있는 기반을 먼저 다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승녕 기자 francis@joongang.co.kr
정재홍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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