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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김을한|해방에서 환국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동경에 있는 영친왕의 저택이 국 유니까 즉시 반환케 하라는 이대통령의 성화같은 독촉에도 불구하고 김용주 공사나 신성모 대사는 당시 일본정부의 견해나 스캡(연합국최고사령부)의 바임이 이른바 속지주의로 일본에 있는 영친왕의 사유재산은 국 유가 될 수 없으며 따라서 몰수는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되자 그 뜻을 경무대에 보고하여 차일피일 날짜를 끌어왔으나 1951년 9윌9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연합국 측의 대일 강화조약이 체결되고 그 이듬해 일본이 대망이 독립을 하게되자 문제는 다시 시끄럽게 되었다.
즉 연합국 측에서는 일본이 독립을 한 이상 그 동안 스캡에서 징발, 사용해 오던 일본인의 건물을 원주인에게 돌려줘야 하겠으므로 동경에 있는 각국 대표부에 대해서도 즉시 다른 데로 집을 구해 나갈 것을 통고하였다. 따라서 은좌 핫도리 (복부)빌딩에 있던 대한민국 주일대표부도 이사를 하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되었는데 당시는 일보니 극도로 불경기인 때라 다른데 집을 구하려면 얼마든지 살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표부의 김용식 공사와 유태하 참사관은 경무대 짓에 충실한 나머지 다른데 집을 구할 생각은 아예 하지 않고 아까사까 (적판)영친왕 저를 대표부로 쓰겠다고 졸라댔었다.
아닌게 아니라 영친왕 저는 동경에서도 가장 환경이 좋은 고대에 있었으므로 거기다가 우리 대사관을 두고 그 위에 태극기를 높이 단다면 동경에서도 제일 가는 대사관이 되겠으므로 생각만을 잘 했으나 그 집을 거저 빼앗으려고 한 것이 잘 못이었던 것이다.
그때 영친왕의 답변은
『우리 나라에서 집을 쓰겠다는 데 어찌 반대를 하리까 마는 지금의 나는 재산이라고는 이 집 밖에는 없고 해방 후 5, 6년 동안을 수입이 없이 살아왔으므로 빚도 많아서 그대로 내놓을 수는 없으니 꼭 이 건물이 필요하다면 시가보다 훨씬 싸게 팔 터이니 사 가시오.』
그러나 대표부 친구들은 덮어놓고 국 유니까 내 놓으라고만 하였고, 우선 집을 비워주면 생계문제는 나중에 따로이 생각하겠다고 할뿐이었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심지어 생활비로 매월 2백 달러씩을 줄 터이니 그 대신에 집을 비워달라고 까지 하였으니 2백달러면 일본 돈으로 7만2천원 밖에 되지를 않아 그것을 가지고는 보통 월급장이도 살아가기가 어려운 금액이었다. 그래서 영친왕비는 분개한 나머지
『도대체 보통 회사의 과장급만 되어도 매월 10만원은 받는데 2백달러를 가지고 대체 어떻게 살란 말이오? 더구나 이 집은, 건물은 우리(이왕직)가 지은 것이지만 터(대지)는 구내성에서 준 것이므로 그렇게 간단히 처분할 수는 없는 것이오.』
그리고 방자 부인은 세금과 생활비로 그 동안 진 빚이 수천만원이나 되므로 일시금으로 대금을 받기 전에는 집을 내어놓을 수가 없다는 것도 덧붙여서 말하였다.
그 결과 당시 제1차 한-일 회담의 한국측 대표로 동경에 와있던 양유찬 주미대사와 주일대표부의 김용식 공사, 유태하 참사관, 그리고 의친왕(이강공)의 아들로 영친왕의 조카뻘이 되는 이수길씨가 여러 번 회합한 결과 다음과 같이 합의를 보았었다.
(1)영친왕저 본관에 세 들어 있는 좌등 참의원 의장을 내어보내서 집을 비워 놓는다.
(2)당시 스캡에 한국정부가 맡겨 놓은 것이 20만달러가 있는데 그 돈은 일본 내에서만 쓰게되어 있으므로 영친왕 저는 한국정부에서 40만 달러로 사기로 하고 우선, 그 선 도금으로 반액인 전기 20만달러를 지불하고 나머지는 나중에 준다.
그런데 당시 일본 정부에서는 오랫동안 참의원 의장의 공저로 사용해온 실적도 있고 하니 영친왕 저를 팔 때에는 꼭 자기들에게 달라고 일본 궁내 성을 통해서 졸라대었으나 영친왕은 모처럼 우리정부에서 쓰겠다는 데 어찌 다른데 줄 수가 있느냐고 끝끝내 듣지를 않았으며 설사 나중에 준다는 20만달러는 못 받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 선도금 20만달러만 주면 팔 생각으로 저기 합의 사항에도 홀연히 동의를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주일 대표부에서는 즉시 그 사실을 경무대에 보고하고 훈령을 기다렸으나 웬일인지 거의 반년이 지나도록 아무 회답이 없었다. 그 때문에 참의원 의장까지 내어 보내어서 그나마 사글세까지 들어오지 않게 된 영친왕 일가의 생계가 더욱 곤란하게 된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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