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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 한국문화를 심은|20년대 한국학의 증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유럽에서 한국학 연구의 중심지가 되고 있는 파리대학에 한국학과를 설치케 한 공로자 「샤를·아그노에르」박사가 70노구를 이끌고 7년만에 한국을 다시 찾았다. 문교부 초청으로 지난 28일 내한 한 노학자는「뉴·코리아·호텔」7층 그의 방에서 제자인 이옥 교수(파리 대 한국학과장)에게『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아늑한 기분』이라고 말하며 감회에 젖었다. 한눈으로 봐도 75세의 고령을 쉽게 알 수 있을 만큼 노쇠한 모습이었다.
그의 건강을 배려해서인지 방도 따뜻하게 난방이 되어 있었다. 그는 제주도를 비롯하여 전국을 여행하면서 언어학 관계자료를 수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가 처음에 한국에 온 것은 1925년 파리 대문학부와 동양어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머무르면서 본격적인 언어학연구에 종사할 때였다.
『남쪽이나 북쪽이나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제주에서 백두산까지 두루 돌아다녔었지요』-.
그는 20년대에 제주방언 연구를 위해 제주도에 두 달 동안 머무르기도 했다. 공이 일본어이기 때문에 교 언어학적 연구를 위해 국어·만주어·몽고어를 연구했다고 말한다.
한국어는 읽고 쓰지만 대화하기에는 불편을 느낄 정도. 그러나 신문은 잘 읽는다.
그의 대표적 저작은 1천 페이지에 달하는『일본문명의 기원』이란 언어학 연구서지만 한국관계논문도 10여 편을 발표했다.
언어학, 역사, 민속 등에 걸친 한국관계 논문들 가운데는「한국의 무속」이라든가,「크리아」,「크레아」,「코레」등 한국을 가리키는 단어의 기원, 신간이라고 불리는「솟대」의 문제 등에 관한 것이 있으며, 30년대의 우리 나라 학자들 이병도·손진태 박사 등의 업적도 해외 학보를 통해 소개했다.
그는 3년 전 대학 교단에서 은퇴했지만 파리 대문학부 명예 교수직과 한국연구소장 및 일본 연구소장직을 맡고 있으면서 요즘도 연구생활에 대한 의욕을 굽히지 않고 있다.
『방대한 저작은 못되지만 앞으로도 몇 편의 한국관계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한「아그노에르」교수는『서구 여러 나라에서 특히 독일·「프랑스」·영국·「스웨덴」·「네덜란드」·소련·미국에서 한국연구가 일어나고 있지만 초창기라고 할 수 있으며 더욱 발전시킬 여지가 많다』고 서구의 한국연구를 설명했다.
그는 28일 서울에 도착한 뒤 여러 대학과 도서관 등을 돌아봤으며『국회도서관을 방문해서는 귀중한 자료와 도서를 보내 준데 대해 특히 감사를 전했다』고 했다.
파리 대의 한국연구소의 한국도서는 2천여 권에 이르는데, 그 대부분을 한국국회도서관이 매년 수십 권씩 기증해 준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그는『책 많이 보내달라는 게 저의 부탁입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3일 상오 비행기편으로 제주도여행을 떠났는데 이어 부산·삼척 등을 1주일 정도 예정으로 돌아볼 것이라 한다. 이에 앞서 그는 2일 국립박물관과 미술관을 방문, 한국의 미술품을 감상했는데『여러 차례 본 것도 있고 새로 본 것도 있지만 언제나 새롭게 느껴지는 게 한국미술품』이라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신라·고려 시대의 미술품은 훌륭합니다. 그러나 특히 고려의 자기가 좋습디다』고 그는 말했다.
언어학자로서 또 한국어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그는『다른 나라 말이 모두 어렵고 또 내가 프랑스 사람이지만 프랑스어가 아직도 신통치 않을 정도지만 한국어에 있어서는 특히 발음이 어렵다』고 한다.
한국어가 몽고어나 만주어와 어떤 유사점이 있는가 하고 묻자 그는『여러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얘기를 하지만 자료수집이 어렵기 때문에 어떤 결론을 얘기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한국은 현대화와 함께 전통문화를 간직하는데도 노력해야 한다』고 말을 맺는다. <공종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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