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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사회 참여|이태영 여사에게 듣는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다시 찾은 조국은 1948년7월17일에 공포된 헌법에서 『모든 국민은 성별에 의해 차별 받지 아니한다』 (9조)고 명시, 반만년을 3종의 그늘에서 살아온 이 땅의 여성들에게 최초의 은전을 베풀어주었다. 그러나 이 헌법정신은 수많은 법조문에 의해 침해되고 있었다.
『54년 국회는 간통에 대한 척벌주의를 채택했는데 (형법2백41조) 이것이 여성을 위한 최초의 법개정이었읍니다. 축첩의 전통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었던 시절이라 남성선랑들의 찬·반 격론이 요란했었지요.』 그 당시 법 개정운동의 선두에 섰던 여류변호사 이태영 박사는 이렇게 16년 전을 회상한다.
『헌법정신에 비추어 남녀앙측을 모두 처벌 하든가 모두 처벌하지 않든가 해야하겠는데, 남자들 상식으로, 간통한 처를 처벌하지 앉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거든요.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쌍벌제를 채택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헌법9조의 남녀평등, 31조 혼인의 순결, 민법8백10조의 중혼금지 등 법 정신에 엄연히 저촉되는 「간통한 여자만의 처벌」 조항은 여성 「데모」 대들이 의사당을 둘러싸고 아우성치는 속에서 한 표 차로 사장되었다.
이 법개정은 남성에게는 물론 여성자신들에게도 「쇼크」를 주었다. 비로소 「남녀평등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고 난 여성단체들은 50년대 후반의 투쟁목표를 「남아있는 악법」 개정으로 집중시켰다.
『60년의 민법개정은 부부별산제인정, 처의 무능력제도 폐지, 모계혈통의 여 호주제인정, 그리고 여성도 양녀와 양친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주고 유산상속에 미망인은 물론 딸들까지도 참가할 수 있는 길을 트는 등 여성지위향상에 거보를 내디디게 했습니다. 성년 된 여성의 분가도 이때 허락되어 쟁쟁한 여류인사였던 미혼의 김활란 박사가 그때 비로소 남자조카 밑에서 호적을 때내어 호주가 될 수 있었던 「에피소드도 있었죠.』
1956년 여성법률상담소 (현 가정법률상담소) 를 마련, 법의 남성펀애에 상처받고 눈물짓는 여성들을 수없이 상담해온 이 박사는 일단 문제가 일어난 여성들에게 법이 얼마나 결정적 생사기로가 되는가를 절감해왔다. 유일한 여성법조인이라는 책임감으로 법개정에 매달려온 그는 해방25년, 법개정22년을 맞는 오늘까지 남녀차별을 성문화하고있는 법개정에 다시 매달릴 각오를 보인다.
『60년 개정이후 10년이 지났으니 이제는 다시 거보를 내디뎌야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재산상속의 분배율, 친권행사, 내조의 가치분배 불인정 등 아직도 개정해야할 법이 너무도 많습니다.』
현행민법은 재산상속에서 딸과 처가 아들의 2분의1, 장남의3분의1, 그리고 출가한 딸은 아들의 4분의1, 장남의 6분의1만을 상속하도록 미망인에게까지 심한 차별을 하고 있다. 또한 친권행사에 있어서는 이혼한 어머니는 계모만도 못하며 부는 처의 동의 없이도 서자 입적을 시킬 수 있어 일부일처제를 측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일본만 해도 아내의 내조와 가사봉사를 축재에 대한 공로로 인정, 이혼소송이 벌어졌을 경우 위자료와는 별도로 재산분배 청구권을 인정하고 있으나, 우리 나라서는 부부분업에 동일한 가치를 주지 앉으므로 가정주부들에게 부부별산제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법은 이상을 향해 분명히 전진할 것입니다. 문제는 남성의 우월감과 여성의 열등감이 뿌리 깊은 우리들의 정신풍토를 여성들이 용기 있게 뚫고 나와 이 법의 이상을 따라와 줄 것인가에 있읍니다.』
해방25년은 여성들에게 많은 것을 주었으나 한편으로는 헌법정신의 구현이 얼마나 멀고 힘든 길인가를 깨닫게 해주었다고 이 박사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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