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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6. 25」20주.... 3천여 증인 회견. 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 전쟁 3년|제2본영...수원(5)|재편과 지연작전(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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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강 남안에서 벌인 국군의 지연작전이 열세한 병력과 장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은 몇 단위 부대가 용감히 싸웠기 때문이었다.
사실 낙오병들로 재편된 혼성부대들은 특출한 전과를 올리지 못했는데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비해 원 부대편성을 잃지 않고 조직적으로 후퇴한 부대들은 적 「탱크」가 대거 도하할 때까지 그 동안 남안에 상륙한 적에 많은 손해를 주면서 선전했다.

<편제견지한 부대는 선전> 한강 남안의 이런 전투에 참가했던 한 대대장의 다음 증언은 혼전 중에도 부대가 편제를 견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주고 있다.
▲장춘권씨 (당시 수도사단 18연대 제2대대장·소령·현 예비역 육군 소장·47)『그때 우리 18연대의 제1대대는 몽땅 휴가 중이었고, 3대대는 신병이고, 제2대대가 가강 정예이었읍니다. 18연대를 통칭 백골부대라고 불렀지요.
26일 우리연대가 동두천방면에서 처음으로 적 포로 12명을 잡는 등 격전을 벌이다가 그후 서울함락으로 행주나루터를 건너 김포반도로 후퇴했습니다. 동두천에 갈 때 우리 병력이 8백 7명이었는데 김포에서 점검해보니 7백 59명이었어요.
그리고 박격포 6문과 2·36「인치」「로키트」포 3문 등 야포를 제외한 중장비도 모두 가지고 후퇴했지요.
29일에 부평방면으로 가다가 적을 만났는데 전투를 피하고 김포비행장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옵니다. 후퇴부대는 접전을 피하는 것이 원칙이지요. 그런데 이미 김포비행장을 점령한 적은 망루에 기관총을 걸고 사격을 해왔어요. 이렇게 되니 싸우지 않을 수 없었지요.

<종일포격·포신도 휘어져> 내가 「로키트」포를 메고 뛰어나가 적기관총을 건 망루 두개를 쳐부수고 돌격해 들어갔읍니다. 이때 마침 B-29 3대가 날아와 활주로 등 적군을 폭격해서 우연한 일치로 한미 양군의 지공합동작전이 된 셈이지요. 이렇게 해서 비행장의 적을 몰아내고 들어가 보니 여러동의 「퀀시트」 안에 약 2천 5백명의 국군포로가 갇혀 있어요. 이들을 모두 석방하고 영등포 네거리를 향해 오다가 적에 포위되어 큰 곤경을 겪었구요. 여기를 탈출해서 소사로 갔더니 그쪽의 아군방위부대가 무너져 하루만 지켜달라고 해서 29일 밤을 거기서 세우고 30일 오류동에 포진했다가 적 1개연대와 정면충돌했읍니다. 오류동 북방의 고지를 점령하고 꼭 48시간 적과 격전을 전개했지요. 하룻 동안에 우리가 가지고 후퇴한 6문의 81mm 박격포로 3천발을 쏘아댔더니, 나중에는 포의 나사가 빠지고 포신이 휘기까지 했어요. 고지를 두번 뺏기고, 세번 탈환했으니까요. 7월 1일이 되니까 적의 기세가 좀 죽었어요.

<오류동서 적 1개연대 섬멸> 이 전투에서 우리측은 중대장 1명과 사병 50명이 전사했고, 적은 1개 연대가 거의 섬멸됐습니다. 이때 부근에는 큰 양계장이 있어서 사병들이 닭을 잡아먹으면서 싸웠읍니다.
2일 저녁이 되니까 갑자기 적「탱크」가 나타나 우리후방을 유린하면서 영등포로 들어가 한강 둑의 아군에 맹 포격을 가하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김포비행장과 오류동 전투는 예정 없이 우연히 피아가 부닥친 전투였습니다. 우리부대는 한강다리가 끊겼기 때문에 행주나루터로 후퇴하는 길이었고, 적도 한강을 곧 못 건너니까, 우회해서 영등포를 치려고 1개 연대를 김포 쪽으로 돌려 침공한 거지요. 동두천에서 노획한 적의 작전지도에는 김포방면으로의 우회침공계획은 없었어요. 어쨌든 우연이긴 하지만 우리부대는 김포와 오류동에서 5일 동안 적을 가로막고 한강방어작전에 기여했다 고 생각합니다. 』 한강 남안의 지연작전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의 하나는 여의도 공방전이었다. 마포로 부터 수시로 도하하는 적을 맞아 꼭 6일 동안 격전을 전개한 이 공방전 상황은 수도사단 제8연대의 몇 장교로부터 들을 수 있다 (주=사정에 의해 증인들은 익명) .
『우리부대는 6·25가 나자 가평으로 출동해 싸우다가 다리 폭파 후 서빙고에서 나룻배로 도강했지요. 이때 도하장의 질서가 엉망이었는데 마침 피난 가려던 육본소속 헌병 80명을 시켜 사태를 수습했습니다. 우리는 1개 대대의 완전한 조직과 81mm 박격포 3문, 61mm 12문, 중기 4정 등을 모두 갖고 도하했지요. 차량만 버렸읍니다.

<적, 새우젓 배로 여의도접근> 6월 28일 하오 3시께 시흥에 갔더니 여의도 쪽 한강둑을 막으라고 해서 5시쯤 목표지점에 도착했읍니다. 이때 우리 병력은 약 1천 2백명쯤 됐지요. 지금의 철교에서 약 1km떨어진 지점으로부터 여의도를 중심으로 한 둑에 호를 파고 포진하자 적은 마포 쪽 둑에 진을 치고 새우젓 어선 등을 타고 여의도에 상륙해와 접근전이 시작됐습니다. 적은 마포 대안에서 중포와 수십대의 「탱크」포로 우리진지에 맹 포격을 가했구요. 우리는 적이 격납고 근처까지 접근할때 1개 중대를 돌려 후방에서 공격하고 전면에서 기관총과 박격포를 쏴댔습니다. 이런 식으로 피아의 혈투가 계속됐는데 하루에도 여의도의 주인이 5, 6차나 바뀌었지요.
쌍방의 시체가 즐비했습니다. 처음에는 둑에서 떨어진 길 건너편에 연대본부를 두고 연대장 서종철 대령 (현 육군참모총장·대장)과 부연대장 이현진 중령이 하루씩 교체로 방어선에 나가 부대를 지휘하다가 나중에는 본부를 아주 둑으로 옮기더군요.

<서종철 연대장 중상 입어> 이때 후방에서 주먹밥을 나르던 병참관계 장병들이 많이 전사했는데 그것은 밥을 둑 위로 나르다가 노출되어 적의 포격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죠. 7월 3일에 적「탱크」 수십대가 폭파 안된 중간 철교를 타고 넘어와 둑 후방을 치는 바람에 한강방어선은 무너졌읍니다.
서종철 연대강은 적「탱크」가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 「지프」를 타고 현장을 보러 나가다가 「탱크」의 기총사격을 받고 중상을 입었는데 뒤따르던 이찬진 부연대장이 구해 차에 옮겨 타게 하여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면했습니다. 여의도 공방전에서 적에 준 피해는 약3천이고 우리측에서는 4백여명의 사상자를 냈읍니다.』 한편 흑석동 방면 전투상황을 한 연대장으로부터 들어보면….
▲윤춘근씨 (당시 제7사단 9연대장·대령·현 예비역 육군소장·54)『6월 30일에 2개 대대 1천2백 병력을 이끌고 수원에서 영등포에 도착해보니, 이미 적1개 대대가 도강해서 적 주력의 도하작전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제1대대(대대장 유항박 소령) 를 왼편에, 제2대대 (대대장 박원경 소령)를 오른편에 각각 배치, 호를 팠지요. 1일 밤에 제1대대 2개 중대병력으로 적 1개 대대가 포진한 고지에 야습을 감행해서 3시간 육박전을 전개했지만 고지를 점령 못하고 후퇴했읍니다. 이때 제1중대장 김정춘 대위가 전사했지요. 적은 1백 22mm 곡사포로 계속 포격을 가해왔지만 아군은 81mm박격포 2문과 기관총 3자루뿐이니까 화력이 문제가 안됐지요.

<야습으로 백병전 3시간> 7월 2일에 다시 백병전이 붙었는데 박원경 대대장이 부상을 입고 후퇴했지만 이 전투에서 적 포로를 몇 명 잡았읍니다. 7월 3일에 10여대의 적 「탱크」가 영등포 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고 사단 CP(성남고교)에 연락했더니, 이미 후퇴해서 9연대도 관악산을 거쳐 안양으로 밀렸지요. 거기서 부대를 점검해보니 약 3백명의 희생자가 난것을 알았읍니다.
당시 1연대와 9연대에는 서북출신의 청년들이 많아서 사기는 왕성했습니다. 6일간이나 지연전투를 전개했다는 것은 자랑할만할 뿐 아니라, 전반 전세에 큰 영향을 준거지요.』
한강 남안의 지연작전에 참가했던 한 소대장은 당시의 군 지휘관들이 후퇴작전에는 아주 미숙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옥창호씨 (당시 제7사단 제1연대 중화기중대 소대장·중위·전 최고회의위원·예비역 육군 준장·44)『나는 제1연대의 1개소대 병력을 이끌고, 김홍일 장군의 시흥 전투사령부의 경비임무를 맡고 있었지요. 우리연대가 시흥에 집결했을 때에는 1개 대대 정도의 병력이었는데 강완채 대위(현 육군소장·○○사령관) 지휘로 영등포 전투에 나갔습니다. 그때 국군에는 방어작전계획이 제대로 마련돼있지 않았습니다. 다리가 끊겨 전투부대들이 조직적인 후퇴를 못해서 작전상의 혼란이 컸지요.

<지휘관들 후퇴전에 미숙> 그때 군 지휘관중에서 「후퇴작전」이란 것을 알고있는 분은 김홍일 장군 뿐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지요. 혼성부대에 대해서 한마디하겠는데 역시 부대는 고유의 자기부대라야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지요. 어떤 경우에도 자기부대 편제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한강철교의 조기폭파로 부득이 혼성부대를 편성해야 했는데 제대로 전투를 할 수 없었지요.
그래도 한강 남안에서 6일간 버티었다는 것은 선전했다고 할 수 있지만 각부대가 한강을 조직적으로 넘어왔다면 며칠 더 적을 막을 수 있었을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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