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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분단 사반세기 그 현장을 따라|굳어지는 장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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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의 삼상회담 결과 한국에 대한 소위 신탁통치안이 결정, 미·소 공동위윈회가 열렸으나 진전이 없었다.
소련은 북한을 점령한 후 애당초 계획한대로 소련과 중국 연안에서 공산교육을 받은 괴뢰들을 요직에 기용, 공산독재주의 행정체제를 착착 확립해갔다.
1946년 2월 9일, 소련군의 꼭둑각시인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어 김일성이 괴수가 되었다.
소련군은 한국인을 징집, 일본군에서 몰수한 무기로 무장시켜 군사훈련을 시켜 인민군·자위대·보안대를 구성했다.
북한에서는 38선에 38보안대가 소군과 자리를 바꾸어 경비를 맡았다. 미군이외에 남한에선 미 군정하의 경찰이 초소를 지켰다.
46년 6월 27일에는 북한에선 농업현물세제가 실시, 수확량의 25%를 세금으로 바쳐야 했으며 그밖에 미곡 수집 정책에 따라 남아있는 곡식도 강제로 바쳐야 했다.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잔교리는 바로 38선 경계마을. 마을 남쪽 복지동에는 남한 경찰이 38경계초소를 설치하고 있었으며 마주 보이는 북쭉 풍치산에는 「토치카」를 구축, 소련군과 38보안대가 엄중 경계를 펴고 있었다.
1946년 초부터 남으로의 월남민이 점점 늘자 충돌이 일어 총질이 시작되었다. 저넉때만 되면 풍치산에서 소련군이 총을 쏘아대어 잔교리 60호 2백여명의 주민들은 살수가 없었다. 할 수없이 이 마을을 버려야했다. 주민들은 그래도 내 땅을 멀리 떠날 수 없어 마을앞 산인 복지동을 넘어 백자동에 가서 내 땅을 찾을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함학종 (63)씨의 말> 38선 경계가 강화되고 월남민이 늘어남에 따라 곳곳에서 충돌사건이 일어났다.
강원도 인제군은 1개 군이 38선으로 두 동강이로 잘려 남쪽은 홍천군에 편입되었다. 이곳 소양강 상류 6백 고지에는 미군과 따로 38검문소가 경찰에 의해 설치되었다. 1949년 2월, 이북에서 38보안대 수명이 넘어와 동네 소를 1마리 끌어갔다. 동네 한청단원들은 그 이튿날 월북 도강하여 이북 소를 끌어왔다.
다음날 38보안대는 6백 고지 검문소를 기습, 38검문소를 불살라 버렸다. 또 다음날 마을청년들은 38보안대 초소를 기습, 똑같이 불살라 버렸다. 날이 밝자 인민군 1개소대가 남침, 6백고지 초소를 점령했다. 그 당시 두촌리에 있던 인제경찰서의 지원을 받아 반격작전을 개시, 이틀만에 탈환했다. 소위 「복지개봉사건」이었다. <이재성 경사(44)의 말>
1949년 8월 6일, 양구에서 이북 인제 지역으로 들어가는 38보안대 지원병력 「트럭」을 경비경찰이 사격, 「트럭」이 전복되고 운전사가 죽었다. 인민군이 대거 남침, 6백고지에서 한달 동안 격전이 벌어졌다. 경찰로서는 이 이상 38경비를 할 수 없어 새로 조직된 국군과 일부의 38선 경비를 교대했다. 이른바 신남사건이었다. 이 결과 홍천군 신남면 부평리에 있던 신남지서가 홍천군 서석면 어론1리로 이전, 어론지서로 개칭되었다. <인제경찰서 남면지서 연혁지>
강원도 춘성군 북산면 추전리에서는 1947년 4월, 춘성 경찰서 오탄지서에 근무하던 김순칠 순경이 소련군에 납치되어 갔다. 소련군은 김 순경을 가죽구두를 주겠다고 꾀어 산꼴짜기로 유인, 38보안대를 시켜 납치했다. 경찰에서는 소련군과 38보안대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나빠졌다. (권기호 경정의 말)
강원도 춘성군 사북면 원평리에 사는 이봉순(60)씨는 l949년 8월 15일, 38경계 남쪽 사직꼴에 밭이 있어 일을 나갔었는데 구구식 장총을 가진 4명의 인민군에게 발견, 도망치자 총을 쏘아 총알을 등에 맞고 계속 도망, 한달 간이나 입원해서 살아났다.
1948년 「유엔」감시 아래 총선거로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 북쪽에는 괴뢰집단이 세워졌다. 1948년 말 한국에 주둔했던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철수를 시작했다.
북한공산주의 괴뢰집단의 국민탄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38선 경계를 넘는 월남민이 많아질수록 38보안대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경계지역에 순찰을 돌며 38선을 더욱더 굳게 지켰다. 그리고 북괴는 38선에 군비를 증강했다.
휴전 후, 38선 때문에 황폐했던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잔교리는 다시 평화스런 마을로 되살아났다. 3천여평의 농토를 가지고 있던 함학종씨는 국군이 북진하자 자기 땅에 되돌아와 무성했던 잡초를 없애고 옥토를 찾았다.
뜨거운 여름 한낮, 지게질에 바쁜 예순 세살의 함씨는 『4형제를 두었지만 시골이 싫다고 모두 도회지로 가는 바람에 7년 고생 끝에 되찾은 이 땅을 지키는 것은 이 늙은이 혼자』라고 쓸쓸히 웃고 있었다.
【공동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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