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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발레리」 25주기|그 시의 고향 「바다의 묘지」에 안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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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금년은 「프랑스」의 냉철한 시인 「폴·발레리」가 죽은 지 25주년, 그의 걸작시 『바다의 묘지』가 발표되어 「센세이션」을 일으킨 지 만50년이 되는 해이다.
「발레리」는 1871년 10월30일 「스페인」 국경이 가까운 남불 「세트」에서 「코르시카」 세관원인 아버지와 「이탈리아」 태생의 어머니 사이에서 탄생, 1945년 7월20일 「파리」에서 죽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프랑스」정부는 국장으로 애도하고 「프랑스」의 영웅들이 잠들어 있는 「팡테옹」에 묻을 계획이었으나 그의 유언에 따라 조용한 항구도시 「세트」에 있는 「바다의 묘지」에서 묻혔다.
그의 묘는 지중해의 푸르고 맑은 물결이 내려다보이는 「몽·셍클레르」산의 『바다의 묘지』에 있는 무수한 무덤들의 사이에 다른 무덤들처럼 평범하게 섞여있다. 부자들이 무덤 옆에 세우는 조그마한 성당도 없고 그의 무덤 위엔 다만 『그라시 가족묘』(「그라시」는 어머니의 성)라는 비문이 새겨진 비석이 서있을 뿐이다. 마침 「발레리」의 미망인이 부군의 25주기를 앞둔 7월8일에 세상을 떠나 13일 이곳에 합장되었는데 아직 흙이 채 마르지 않은 묘앞엔 붉은 백일홍 화분 4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조용한 지붕 위에 비둘기들이 걷고 있다
꿈틀거리는 소나무와 무덤들 사이에
정오는 불꽃을 이뤄진다
바다 바다는 영원히 다시 시작된다
신들의 오랜 침묵을 바라보는 것 보다도
더 오랜 명상 후에, 오 보답할 지어다.
이것은 1920년 발표되어 「프랑스」 최고의 시인으로 군림하게 된 『바다의 묘지』 첫 연이다.
「발레리」는 어린 시절부터 바다를 보고 살았다.
그의 신비감과 회의감과 죽어야 할 인간운명에 대한 철학과 냉철은 영원히 출렁이는 파도, 무한한 바다를 바라보며 생긴 것임을 이곳을 찾는 이에겐 쉽사리 짐작이 간다.
「발레리」는 초등학교를 고향인 「세트」에서 마치고 중학은 50km 떨어진 「몽펠리에」서 다녔다.
수학에 취미를 못 붙여 해양학교 입학을 포기하고 「빅토르·위고」 「고티에」 「보들레르」의 시를 탐독하며 「몽펠리에」 법대에 입학한 후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후 군대복무 중 「피에르·루이스」를 만나 그의 잡지 「라·콩크」에 첫 시를 발표했다.
그와 동시에 「앙드레·지드」를 알게 되고 「말라르메」를 소개받게 되어 두사람은 「발레리」의 일생의 친구요 스승이 되었다. 젊은 시인 「발레리」는 점점 철학에 몰두하게 되고 『「레오나르도·다·빈치」의 방법서론』, 『「테스트」씨와의 야화』를 발표, 주지주의 철학을 확립하게 된다.
그러나 「발레리」는 1897년 돌연 시를 떠나 국방성에 취직한다. 그후 줄곧 공무원 생활을 계속하며 한때는 「아바스」 통신사에서도 일을 했다. 1900년 결혼하여 가정생활에 정을 붙이고 기하학적 지성의 고행자 「테스」를 본받아 그후 20년동안 침묵을 지키며 수학·역학 등 추상과학적 지성훈련에 파묻힌다. 그러다가 1917년 친구들의 권유로 4년동안 고심한 끝에 『젊은 「파르크」』를 내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는 주제에 있어서나 어조면에서 「말라르메」의 영향을 떠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20년 발표한 「바다의 묘지」에서 그의 시는 난해한 연금술적, 추상적 서정시의 표본으로 간주되고 그는 시인으로서 절정에 이른다. 이어 『바리에타』 전5권으로 탁월한 도덕주의자와 문명비평가로서의 지위를 확보한다.
1925년에는 「프랑스·아카데미」 회원에 선출되고 「콜레지·드·프랑스」에서 교편을 잡고 1931년에 『현 세계에 대한 관찰』을 내고 미완성작품 『나의 「파우스트」』를 남겼다. 전쟁 중에는 「비시」정부에 반대하여 「작가전선」에 가담, 「레지스탕스」의 대열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는 1945년 7월20일 「파리」 해방의 기쁨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발레리」는 무엇보다도 이지를 앞세우고 시인의 영감보다는 냉철한 도식과 엄격한 시작법의 통제를 존중했다.
그는 전통적인 시작법을 철저히 준수하면서 「말라르메」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지만 상징주의와 고전문학의 원칙을 조화시켜 완벽한 독자적 시세계를 이루고 어느 특정한 유파나 사조에 휩쓸리지는 않았다.
그는 「렝보」와 같이 감정을 터뜨리지는 않지만 냉철한 빛을 뚫기 전에 일단 감정의 그늘을 거치기 때문에 순수지성의 미학과 절망적인 분석의 논리에만 빠져들지 않고 풍부한 「이미지」를 구사하여 자신의 주장을 넘어 뜨거운 생명의 부름을 받아들임으로써 맥박이 통하는 위대한 시인이 될 수가 있었다.
이제 그는 그의 고향이며 어린 시절의 인상이 강력히 박힌 『바다의 묘지』 - 『죽음으로 이끌고 순수한 사고로 이르는』 시 아닌 진짜 「바다의 묘지」에서 영원히 잠들어 있다.
「세트」시에선 내년에 맞을 「발레리」 탄생 1백주년 기념을 위해 새로 「폴·발레리」 박물관을 짓는 등 다채로운 행사준비에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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