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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On Sunday

내 마음속의 증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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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해졌다. 좀체 물러날 것 같지 않던 폭염도 드디어 한풀 꺾이는 모습이다. 귀뚜라미 더듬이엔 온도계라도 달려 있나 보다. 미묘한 계절의 변화에 그새 어디선가 나타나 밤늦도록 울어대니 말이다. 맞다. 올여름 참 길고도 길었다.

 날씨가 무덥다 보니 조금만 힘들어도 쉽게 짜증내는 사람이 주위에 많았다. 돌이켜보면 평소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넘길 일에도 자기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내고 독한 말을 내뱉은 적이 지난여름 누구나 한두 번씩은 있었을 거다. 올해는 유난히 불쾌지수도 높았다.

 그렇다고 찜통더위가 독설과 짜증의 유일한 기폭제가 되진 않았으리라. 이는 평소 우리 마음에 여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스트레스나 외부 자극이 와도 마음속에 여유 공간이 있으면 완충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 공간을 여유 대신 증오가 꽉 채우고 있으니 조금만 충격이 가해져도 흡수할 여력이 없었던 게다. 그 증오는 어디에서 오는가. 나만 옳다는 아집,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불관용, 마음속 뿌리 깊은 콤플렉스가 내 마음속 증오를 키우고 있는 건 아닐까.

 조그만 일에도 욱하고 치받는 사람들이 늘어난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 1월 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정신질환 고위험자가 368만 명에 달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스트레스나 외부 자극을 처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일부는 우울증 증세를 보인다고 한다.

 게다가 우리 사회의 스트레스 지수는 갈수록 악화되는 추세다. 지난해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82.8%가 만성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답했다. 하지만 전문기관을 찾아 상담·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고 응답한 이는 5.9%에 불과했다. 다섯 명 중 넷은 스트레스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셈이다.

 현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여야는 서로 네 탓만 하며 싸우고, 남북한은 한 치의 양보 없이 기싸움을 벌인다. 국정원의 내란음모 수사가 모든 정치 이슈를 블랙홀처럼 집어삼키고 있는 와중에서도 한반도의 정치시계는 오늘도 째깍째깍 돌아가고 있다. 내일부턴 정기국회가 열리고 추석을 전후로 각종 남북대화도 예정돼 있다. 지금이야말로 국내 정치에서나, 남북관계에서나 서로에 대한 증오를 누르고 먼저 손을 내밀 줄 아는 여유와 용기가 필요한 때다. 증오의 정치가 당장은 짜릿할지 몰라도 그것만으론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 수 없다.

 이제 9월이다. 청명한 가을하늘을 벗삼아 세상 잡사로 가득찬 머리와 마음을 비워 보자. 책 한 권 손에 쥐어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래, 올여름에 짜증을 좀 많이 냈지’ 싶으면 심호흡 크게 한번 하며 마음속 무거운 짐을 내려놔 보자. 그리고 가족과 동료에게도 웃으면서 한마디씩 건네 보자. “저번에 짜증내서, 맘 아프게 해서 미안해. 그리고 잘 참아줘서 고마워.”

박신홍 정치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