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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의 반격에 정치권 ‘지원 사격’ … 甲도 비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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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8호 06면

민주당 ‘을지로위원회’ 우원식(왼쪽 사진 오른쪽) 위원장이 지난달 27일 LG유플러스 현장 방문 결과를 전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새누리당 ‘손가위’의 지난달 20일 제 1차 전체회의 모습. 왼쪽부터 김기현 정책위의장, 최경환 원내대표, 안종범 손가위 위원장. [뉴스1]

지난달 15일 새벽 2시 서울 서초구 강남 교보타워 앞. 민주당 ‘을지로(乙을 지키는 길)위원회’ 소속 의원 6명이 간이의자를 놓고 대리기사들과 마주 앉았다. 대리기사들이 일과를 마치고 집결하는 시간·장소에 맞춰 ‘길거리 정책간담회’를 연 것이다. 생업 현장에 직접 찾아가 목소리를 듣겠다는 취지에서다. 30여 명의 대리기사들은 의원들에게 ▶콜이 뜬 후 5초 안에 응답하지 않으면 벌금을 물리는 제도 ▶대리운전 업체들의 일방적인 입사 보증금 요구 같은 애로사항을 쏟아냈다. 간담회는 새벽 3시30분쯤 끝났다.

100일 된 민주당 ‘을지로위원회’vs 갓 출범한 새누리당 ‘손가위’

 이날 모인 의원들은 나흘 후인 19일 기자회견을 열고 ‘대리기사 처우 개선’을 위한 입법 추진과 함께 공정거래위원회와 관련 부처에 개선 방안을 찾도록 요구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현장 행보’는 정기국회가 열리는 이달에도 이어진다. 4일엔 새벽 5시30분 경기도 과천 경마장에서 마필관리사들의 생업 현장을 찾을 예정이다.

 현장 방문은 을지로위원회의 주특기다. 지난 5월 출범 후 위원들은 지난달 20일까지 100일간 35차례 넘게 현장을 방문했다. 사흘에 한 번꼴로 현장을 찾은 셈이다. 을지로위원회를 두고 당내에선 “민주당의 변화의 상징”이라는 자평이 나온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지난달 25일 형수상을 당해 잠시 귀국한 손학규 상임고문에게 자신의 성과로 소개한 것도 을지로위원회다. 지난해 대선·총선 패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돌파구가 ‘을지로위원회=민생 행보’임을 은연중 과시한 셈이다.

 을지로위는 지난 4월 남양유업이 대리점주에게 물량을 강매한 ‘밀어내기’ 사태로 ‘갑(甲)의 횡포’가 이슈화되면서 만들어졌다. 당시 을지로위는 남양유업 본사와 피해 대리점 협의회 간 협상 타결을 도왔다. 지금까지 미니스톱·CJ제일제당·배상면주가 등 불공정거래 관행 불만사항이 접수된 기업과 피해 주장 당사자 간의 협상을 중재했다. 당 홈페이지의 을지로위 신문고엔 지금까지 200여 건의 건의사항이 접수됐다. 이 중 을지로위 취지에 맞는 40여 건을 추려 25명의 책임 의원을 배정했다. 처리 속도도 빠른 편이다. 배상면주가의 인천대리점을 운영하는 김상민(31)씨는 “지난달 22일 신문고에 글을 올렸더니 다음날 바로 연락이 왔다. 시민단체에도 연락했지만 을지로위원회가 가장 빨리 답을 줬다”고 설명했다.

 이에 맞서 새누리당도 민생 챙기기에 나섰다. 지난 13일 출범한 당 정책위 산하 ‘손톱 밑 가시 뽑기 특별위원회(손가위)’ 위원들은 27일 부산·통영으로 향했다. 현지 소상공인·중소기업인과 도시락을 먹으며 ▶지방 중소기업의 병역특례 인재 채용 인센티브 지원 요청 ▶우수 여성 인력 유출을 막기 위한 공단 내 탁아소 설치 규제 완화 등 건의사항을 들었다. 이달 초엔 경기도의 기업 현장을 찾을 계획이다. 안종범 위원장 측은 “진짜 (손톱 밑) 가시를 가려내는 작업 때문에 출범식이 늦어졌다”며 “당 정책위원회를 중심으로 7월부터 전국 각지에서 20여 차례 민생 탐방을 했고, 그 결과를 정책·예산에 반영할 것”이라며 “이벤트성으로 끝내지 않고 당·정·청 협의를 통해 입법뿐 아니라 조례·시행령 등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써서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을지로위 우원식 위원장은 “현장에 답이 있다는 생각으로 발로 뛰고 있다”며 “백화점·대형마트, 가계부채 문제로 행동반경을 넓히며 입법·예산 반영에 적극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손가위 안종범 위원장은 “민생 현장에서 수집한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애로사항을 입법에 반영하고 현장 중심 정책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여야 대치 정국과는 다른 분위기다.

“게릴라식 활동 말고 정당답게 행동을”
의원들의 현장 출동을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위평량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은 “정부가 제대로 역할을 못 하니까 정당이라도 나서서 ‘을’로 대표되는 서민을 지키겠다는 행보”라며 “오랜만에 제대로 된 정당의 활약을 본다”고 옹호했다. 그러나 국회가 행정부나 시민단체가 할 영역에 너무 나선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형준(정치학) 명지대 교수는 의원들의 현장 행보에 대해 “한국 정치 수준이 그만큼 낮다는 방증”이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의 비판이다. “거리 정치에 함몰돼 길을 잃은 민주당의 대표적 모습이 을지로위원회다. 시민단체와 차별화하지 못하고 정당으로서의 권위를 스스로 무너뜨렸다. 제도권 정당으로 역할을 못하는 부분을 말의 성찬과 발품으로만 덮으려 하고 있다.” 김 교수는 새누리당을 향해서도 직격탄을 날렸다. “집권당이 청와대 오더(order)만 기다리다 스스로를 ‘주변부(marginal) 정당’으로 왜곡시키고 있다. 경제 패러다임을 진짜 바꾸겠다면 청와대·여당이 수직적 상하관계가 아닌 수평적 대등관계가 돼야 하는데 지금은 거꾸로다”라고 꼬집었다.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장인 이헌욱 변호사는 두 위원회 활동을 “게릴라성”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현장에서 게릴라식 활동을 보이는 데 그칠 게 아니라 정당답게 정책 방향을 설정하는 방식으로 주도권을 쥐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문했다. 제도권 정당이 자칫 민원 해결 창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다.

 손가위와 을지로위원회가 진정 민생을 생각한다면 초당적 협력관계를 모색해야 한다는 주문도 있다. 가계부채나 복지공약, 민생법안과 같이 중복되는 의제를 정쟁 도구로 삼지 말고 미국의 공화·민주당처럼 법안을 공동 발의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여야의 민심 잡기 경쟁이 본격화하면서 국회 담당 직원을 따로 두는 기업들도 늘어나고 있다. 을지로위원회 조영민 기획팀장은 “기업들의 목소리도 들어가며 중간자적 입장에서 중재를 해나가고 있다”며 “사측 입장을 듣고 사실관계를 정확히 파악한 후 액션을 취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실제로 ‘갑’으로 지목되는 기업들은 을지로위원회의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걸핏하면 ‘기업 대표를 국정감사장에 부르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사진 한 장 찍으려는 쇼 아닌가”
을지로위원회가 불공정행위로 문제 삼은 한 기업의 마케팅팀 관계자는 익명을 전제로 “처음부터 ‘기업이 무조건 잘못했다’는 식으로 나왔다. 설명을 하려고 하면 기분 나빠 하면서 ‘그래서 잘못이 없다는 거냐’는 식으로 나와서 황당했다”고 말했다. 다른 기업 관계자는 을지로위원회와의 만남 뒤 “우리에게 작정하고 호통치러 온 사람들 같았다. 우리 입장을 설명하려고 하면 ‘대표이사를 국정감사에 부르겠다’는 엄포를 놔서 어이가 없었다. 민주당이 갑의 횡포를 바로잡겠다면서 오히려 기업에 갑 노릇을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을의 반격이 거센 마당에 정치권 지원 사격까지 더해져 기업 쪽에선 ‘답답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다른 기업의 관계자는 “팩트(사실)부터 잘못 알고 온 경우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이 기업은 2009년 이후 식품위생법이 바뀌면서 병에 붙는 원산지 표기 글자 크기를 7포인트에서 12포인트로 키우게 됐다. 스티커 작업을 한 뒤 물건을 보냈는데 대리점 측에서 “제조 연월일을 속인 제품을 밀어넣기했다”고 을지로위원회에 제보했다는 것이다. 이 기업 관계자는 “대리점주 입장만 듣고 와 우리를 윽박지르는데 얼이 다 빠졌을 정도다. ‘국정감사에 세우겠다’고 호통쳐서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기업 이미지를 생각해야 하는 입장이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다른 주류업계 관계자도 비슷한 고민을 털어놨다. ‘살균 약주’의 경우 유통기한(당시 1년)을 표기하지 않아도 되도록 관련 법이 바뀌었는데 예전의 유통기한을 생각한 판매대리점주들이 을지로위원회에 “유통기한이 지난 제품을 부당하게 밀어넣기 했다”고 고발했다는 것이다. 다른 기업 관계자는 “예전에 과징금을 냈던 사안인데 ‘당시 징계는 솜방망이였다’며 다시 들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주장했다.

 거꾸로 기업 입장에서 대리점주에게 억울함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한 주류업체 관계자는 “계약서상에 우리 제품만 팔기로 하고 지역독점권을 받아갔는데 경쟁사 제품도 같이 취급을 하는 경우가 많다. 갑을 논리에서 보면 무조건 우리가 나쁜 놈이 된다. 다섯 개 구(區)를 담당하는 대리점의 월 매출이 10만8600원밖에 나지 않은 건 영업을 뛰지 않았다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지역 독점권을 요구하고, 응하지 않으면 악덕 기업으로 (정당이나 관련 부처에) 제보를 한다. 기업 이미지를 생각해 냉가슴만 앓는다”고 전했다.

 현장방문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자칫 ‘민생 현장 방문 쇼’로 끝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27일 새누리당 손가위 부산 간담회에 참석한 한 기업인은 “의원들이 건의 사항에 대해 똑 부러지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며 “민생을 찾아다닌다는 당의 노력을 부각시키고 사진 한 장 찍으려는 쇼가 아닌가 싶었다”고 꼬집었다. 같은 자리에 참석한 이수태 이노비즈협회장은 “의원들이 6명이나 온 건 지금까지 숱하게 봐온 이벤트성 간담회와는 달랐다. 누군가 내 얘기를 들어준다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있었다. 다만 뾰족한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은 건 아쉬웠다. 시간이 걸린다는 건 알지만 앞으로 해결해주겠다는 그 약속을 꼭 지켜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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