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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남」과 「북」의 형세>(14)|남의 허점(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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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대국적으로 보아서 미국의 「아시아」정책이 우유부단했기 때문에 남침을 초래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책임을 전적으로 미국에만 돌린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비록 미국의 대한군경원조가 본 연재 전회에서 다룬 것처럼 극히 제한되고 계획성이 없었다해도 우리 자신이 좀더 단결해서 정신을 차리고 대비책을 마련했더라면 6·25 초에 북괴군으로부터 그렇게 압도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중지란과 함께 적의 구미가 당길만한 여러 허점이 한국에는 많았던 것이다. 이 책임은 당시의 정부·정치인·군인 등 지도층 모두가 져야할 문제이다.

<육본에서 긴급 건의서>
한국으로서는 가장 중요한 시기인 6·25전 1년 동안에 정계를 뒤흔든 가장 큰 사건이 개헌과 소위 외군 철수를 둘러싼 일련의 파동이었다.
이 개헌기운은 1949년 후반기부터 움트기 시작해서 50년 1월 28일에 국회에 제출되어 3월 9일에 상정, 그달 14일의 표결에서 찬 79 반 33 기권 66으로 부결됐다.
이 동안에 정부와 국회내의 개헌 찬반세력은 정면으로 맞붙어 정쟁에 영일이 없었는데 바로 이시기에 북괴는 남침의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었다. 육본의 강문봉 작전국장이 5월초에 적정이 심상치 않다는 긴급 건의문을 국회에 제출했으나 개헌문제로 극한대립상태에 있는 국회의원들은 아무런 손도 쓰지 못했다.
그럼 이제 적침을 눈앞에 두고 한국에 정치적 혼란을 가져온 이 개헌과 외군 철수문제에 대해 몇 사람의 증언을 들어보기로 하겠다.

<2대 시비 개헌·외군 철수>
▲이인씨(제헌국회의원·초대법무장관·73) 『배경을 간단히 말한다면 이승만 대통령은 한민당이 밀어서 집권했는데 조각때에는 김도연씨(고인)만 재무에 앉혔어요.
그때 한민당에서 5, 6석인가 장관자리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했으니까 감정이 좋을리 없지. 그리고 이 박사도 대통령이 되고서 차차 독재 기미를 보였었어요.
그래서 내가 법무장관을 그만둔 후 이강우 의원(진주출신·납북)과 함께 내각책임제 개헌을 해서 행정부의 독주를 견제해 보려고 했지. 이강우 의원이 약 30명의 동의서명을 받았을 때 민국당(한민당과 신익희씨의 국민당이 합당한 것)의 서상일 의원이 자기에게 인계하라고 했어요.」
결국 서 의원이 79명의 동의서명을 받아 국회에 제출했고 민국당에서는 당 결의까지 했어요. 표결에서 개헌안이 실패한 것은 정치자금이 모자랐기 때문이었어. 무소속 포섭에 돈이 많이 필요했거든.

<정치자금 모자라 실패>
그때 겨우 1백 50만원을 마련했는데 김성수씨더러 5백만원만 더 내놓으라고 졸랐지만 마침 돈이 없었어요. 김성수씨는 개헌선인 1백 32명보다 8표가 더 넘을 거라고 점쳤고, 나는 15표쯤 미달된다고 봤는데 내가 맞은 셈이지요.
개헌문제로 이 박사와 국내 최대의 정치세력인 민국당과는 정면으로 대립하게 됐지요. 그때만 해도 국회 내에 민국당 만한 규모의 정당은 없었어요. 다음에 외군 철수안인데 그때 국회내의 소위 소장파 의원들 10여명이 주동이 돼서 60명 연서로 한반도에서 외국군은 다 나가라는 결의안을 제출했어요. 결국 나중에 알고보니, 공산당이 이들 소장파의원에 「프락치」를 박아서 이용한 거지요.

<이용당한 소장파 의원들>
다른 의원들은 단순한 생각에서 따라갔을 뿐이예요. 여하튼 제헌국회에서 정국을 뒤흔든 양대사건이 개헌과 외군 철수문제인 것은 틀림없지요
▲최헌길씨 (제헌 국회의원·전 경기·강원지사·70)『그때 민국당이 개헌안을 낸 것은 승산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이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경고의 효과를 노린 것 같아요. 이 대통령의 영도력이 강력했기 때문에 개헌안 통과는 가망이 없었지요. 민국당은 개헌안 지지의 당 결의까지 했지만 끝판에서는 두 패로 갈라져 당론 통일이 안됐지요. 개헌안 부결에 관권이 양성적으로 대거 개입했다는 일부 주장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도 않았읍니다.』
▲손재학씨(제헌의원·70)『개헌안 동의 서명 날인서는 내가 가지고있었는데 처음분위기는 많은 무소속 의원들이 동조해서 매우 희망적이었읍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윤치영 의원이 정부편을 들어 벌인 소위 「백표 운동」(기권표 던지기)이 주효했는지 정세가 달라지더군요.

<「백표운동」이 주효>
「백표를 던지면 다음 선거자금으로 3백만원을 주고 재선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무소속 의원들을 유인했다는 풍문도 돌았지만 확증은 잡지 못했어요. 하지만 지금도 이야기하기가 부끄러운 일들이 뒷구멍으로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김갑수씨(당시 내무차관·현 변호사·57) 『내각책임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이 나와 이 대통령이 백성욱씨를 내무장관으로 기용, 여러모로 대책을 세웠읍니다. 백 장관은 김병완씨를 치안국장 서리로 임명하고 두분이 어떤 대책을 세운 것 같은데 그때 나는 「아웃 사이더」(권외자)이어서 내용은 잘 모릅니다. 한가지 기억나는 것은 국회 방청석에서 괴한이 개헌 반대 「비라」를 의장에 뿌리고 도망친 일이 있었지요. 국회의원들이 이 문제를 백 내무에 추궁했지만 끝내 범인은 못 잡았어요.

<괴한이 개헌 반대 비라>
그때 국회의원들은 「건국과 제헌」의원이라는 「프라이드」가 대단해서 설사 정부에서 어떤 수단으로 공갈이나 매수를 하려고 했어도 쉽게 넘어가지 않았을 겁니다. 내 생각으론 개헌 부결의 큰 원인은 국회의원들이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아 차기 선거문제로 마음이 약해진 탓으로 봅니다. 어쨌든 그때 개헌안이 통과됐더라면 더 「큰 일」이 뒤따랐을 겁니다.』
▲최석화씨 (제헌의원·59) 『나는 철군이야기를 간단히 하겠어요. 이 결의안을 낸 몇 주동자 이외의 동조의원들은 공산주의를 잘 모르는 정치적 미숙자였고, 단지 통일 독립을 바라는 마음이었을 거예요. 박종남 의원이 제안설명을 할 때 내가 단상으로 뛰어 올라가 멱살을 잡아끌었더니 20여명의 서명의원들이 달려들어 큰 싸움이 벌어졌었지요. 이때 신익희 의장이 의사봉을 탕탕 치면서 「다들 들어가시오」한 다음 「멱살을 멱살로 잡아 나꾸는 것은 불법을 불법으로 다스리는 것」이라면서 「피장파장이니 모두 그만 둡시다」하고 얼버무리고 산회했어요. 그후 철군 결의안은 표결에 붙이지도 않고 흐지부지 돼 버렸읍니다.』

<철군 토의 때 난투극>
한편 객관적 입장에서 이 개헌과 철군문제를 취재 보도했던 한 정치부기자는 그때 일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박홍서씨(당시 연합신문 국회 출입 기자·현 한국편집인협회 사무국장·55)
『정부가 수립된 지 1년 6개월밖에 안되었는데 개헌안이 나왔기에 일반은 상당히 의아했어요. 대통령 중심제를 시비하기에는 상조란 말이예요. 솔직히 말해서 한민당이 첫 조각때 대거 참여못했으니깐 개헌을 통해서 권력을 쥐어보자는 거지요. 하지만 한민당도 국민당과 합쳐서 민국당이 되고 부터는 김효석 윤보선 장기영 김도연 제씨가 입각하여 6, 7석의 중요각료자리를 차지했어요. 민국당은 차제에 이승만 대통령은 다만 상징적 국가원수로 두고 정권을 잡자는 의도에서 개헌안을 낸 거지요.

<일렀던 대통령제 시비>
그러니까 일반의 지지를 못 받은 거예요. 그때 신문도 ××일보만이 개헌을 찬성했지요. 그때 한민당에 대한 국민의「이미지」는 미 군정과 너무 「밀착」했었다는 이유도 좋지 않았거든요. 그러나 원내세력은 민국당이 우세했읍니다.
정당은 선거에 불참한 한독당을 제외하고는 민국당 밖에는 없었으니깐요. 그런데도 개헌안이 부결된 것은 이 박사의 영도력이 강력했기 때문이죠. 하옇든 1950년 3월 14일에 부결될 때까지 한 석달 동안은 국회가 이 개헌시비로 들끓었지요. 원외에서 반대궐기대회 같은 것도 열었구요.
통과됐으면 어떻게 됐겠느냐는 가정을 놓고 생각한다면, 한마디로 「큰 혼란」이 일어났을 겁니다. 그리고 개헌표결은 바로 6·25나기 3개월 전인데 가결됐더라면 북괴의 침공속도는 더 빨랐을 겁니다.

<개헌됐으면 큰일 뒤따라>
외군 철수는 말발이 센 국회 소장파 의원들에게 파고든 공산당 농락에 일부 의원들이 넘어간 거구요. 이것도 결과적으로는 제헌국회로서는 큰 허물이었지오.』
이상 증언에서 본 바와 같이 제헌국회는 북괴가 침공준비에 마지막 손질을 하고있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개헌과 외군 철수문제를 가지고 시간을 허비했다. 물론 정부측에도 과오가 컸었다. 관계 장관들이 국회에서 낙관적인 발언만 했고, 정말 다급한 적정보고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5월에 가서야 강문봉 작전국장을 통해서 의원들에게 알렸으니까. 이때는 이미 의원 임기가 1개월밖에 남지 않아서 어떤 손쓸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설혹 임기가 많이 남았다해도 개헌문제로 여야가 도드라져 있어 별 신통한 대책을 마련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국내 정국과 외환은 함수관계에 있다는 고금동서를 통한 진리를 여기서 다시 한번 되새기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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