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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휴전은 불명예로 시작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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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미국을 비롯한 자유우방이 이승만 박사의 주장만 따랐더라도 한국의 통일은 17년 전에 벌써 이뤄졌을 것이다.』-조국의 허리를 다시 끊어놓은 한국 휴전조인 17돌을 맞아 당시 정전회담 한국 측 수석대표였던 최덕신 장군(당시 육군소장·현 천도교 교령)은 이렇게 되새겼다. 주한미군 일부 감축론으로 대미관계가 다시 긴장하게된 지금, 17년 전의 비슷한 정세를 회상하면서 어떤 교훈을 끌어내듯 그렇게 말했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은 참전 16개국들이 공산측 휴전제의를 받아들인 53년 7월 27일 통일 없는 휴전을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 우리 정부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회담은 처음부터 포로 송환문제로 양측의 주장이 맞서 중단을 거듭하면서 진전이 없었다.
『휴전조인 3개월 전인 53년 4월 11일 이 박사는 한국군 단독으로라도 북진해야겠다고 발표하고 24일에는 만약 중공군이 압록강 이남에 남는 것을 허용하는 휴전조약이 조인된다면 한국군을 「유엔」군 지휘하에서 철수시키겠다는 뜻을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전했지요.』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동경에 있던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장군을 서울로 보내 『과거 2년 반 동안 총구를 겨누고 쫓아내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중공군에 일방적인 철수를 요구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라고 이 박사를 설득하려 했다.
이 박사의 태도는 강경했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중공군을 우리 국토 밖으로 몰아내는 일이요. 우리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가 결정짓겠다는 뜻을 「아이젠하워」대통령에게 전하시오』라고 「클라크」장군에게 말했다. 그러자 「클라크」장군은 『휴전회담을 계속 반대하면 한국은 고립된다』고 위협하면서 『미국은 계속 전쟁을 수행할 힘이 없다』고 역설했다.
이 박사는 『나야 야전군 사령관이 아니오. 내 군대까지 장군의 지휘하에 두면서 이 전쟁을 이겨달라고 했는데, 전쟁을 이기지 못하겠다면 나는 어떻게 우리국민에게 이것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장군이 말한 이 전쟁에서 항복해야겠다는 것을 써서 우리 국민들에게 알리도록 하자』고 따끔하게 말해 「클라크」장군을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반공포로를 중립국가로 이송하는 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성명했다. 당시 「유엔」군은 12만명의 포로를 수용하고있었다. 53년 5월 25일 「유엔군 측은 한국대표단도 모르게 회담조인 직후 7만명의 포로를 직접 북송하고 나머지는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넘기기로 공산 측에 양보했음이 드러났다.
이 박사는 이때부터 한국대표(최덕신 소장)의 회담 참석을 거부하는 한편 휴전반대 7개항의 위협 성명을 발표했다. 「클라크」장군이 「위싱턴」에 전한 이 박사의 성명은 (1)휴전조인에 앞서 일방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한다. (2)휴전이 조인돼도 이를 준수하지 않는다. ③ 「유엔」군 휘하에서 한국군을 철수시킨다. ④휴전 반대 시위운동 전개. (5)휴전 후 한국군의 비무장지대 철수거부. (6)인도군 입국 거부 (7)적에 대한 공격개시 등이었다.
『李박사는 무수한 인명과 거액의 재산을 잃으면서 3년간의 전쟁을 치르고 난 미국이 한국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겨주지 않으리라는 점을 계산에 넣고있었던 거지요.』 최덕신씨는 통쾌하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미국의 반응은 빨랐다. 5월말 미국 정부는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시사해왔다.
이 박사는 미국의 제의에 대한 회답을 하지 않은 채 6월 8일 2만 7천명의 반공포로를 석방, 우리 정부의 결심을 한층 뚜렷이 했다.
『휴전회담이 한창 무르익어 갈 무렵 반공포로를 석방한 것은 「유엔」측 대표에게 한때 곤란을 주었지만 우리의 강경한 태도를 공산 측에 보임으로써 오히려 「유엔」측이 회담의 주도권을 쥐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고 최덕신씨는 말했다.
한국정부의 승인 없이는 휴전회담이 불가능함을 안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곧 이 대통령을 공식적으로, 그러나 비밀리에 미국에 초청했으나 이 대통령은 중대한 시기에 떠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이 박사의 고집을 꺾지 못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그의 특사로 「윌터·로버트슨」 국무성 극동담당 차관보를 서울로 보냈다.
한국 정부가 이 이상 더 휴전협상을 파괴하지 말도록 이 박사를 설득하기 위해서 였다. 곧 이어 태평양을 건너온 많은 「례이션·박스」가 반갑지 않게 한국에 쏟아져 들었다. 미국은 휴전 반대시위 군중을 이것으로 달랠 속셈이었다.
그러나 6월 25일 「로버트슨」차관보가 서울에 왔을 때 시위군중들은 『북진』을 외치며 시가를 메웠고 학생들은 『한국을 공산도배에게 팔아 넘기지 말라』고 울부짖었다.
18일 동안 매일 매달렸던 「로버트슨」이 떠날 때 이 대통령은 휴전협정을 묵인한다는 엄청난 조건을 내걸고 이를 「아이젠하워」대통령에게 전하도록 했다. 그 조건은 휴전 성립 후 한」미 군사조약을 체결한다는 약속(그 뒤에 체결됐음) ②장기간의 경제원조와 2억 「달러」의 제1차 원조약속(휴전조인 즉시 9백 50만「달러」의 식료품이 공여되고 계속 원조되었음) 휴전협정 조인 뒤 90일 안에 열리는 정치회담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할 때엔 한·미 양국은 이 회의에서 퇴장, 한국 통일에 관한 장차 행동을 토의한다. ④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하고 해·공군력을 증강시킨다. ⑤정치회의가 열리기 전에 공동 목표의 문제들을 토의하기 위해 고위 한·미 회담을 연다는 것이었다. (「덜레스」 미 국무장관이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해 8월 방한했다.)
이렇게 하여 명예롭지 못한 휴전협정은 조인되었고 3년 이상 끌었던 전투는 끝났다.
「유엔」 측을 대표하여 휴전협정에 조인하고 나온「클라크」장군은 이날 『미국 정부의 훈령에 따라 역사상 승리없는 휴전에 조인한 최초의 미군 사령관-아무도 부러워하지 않는 영예를 얻었다』고 장탄식 했단다.
『이 박사의 강경했던 대미 외교의 성과는 컸었지만 국력이 미치지 못해 국민의 여망인 통일정부 수립을 못본 채 휴전조인을 막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恨)』이라고 최덕신씨는 말했다.

<오만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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