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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영친왕은 그해 12월에 육군중장에 승진하고 다음해 7월에는 우도궁 제51사단장에 임명되어 8월에는 벌써 부대를 이끌고 북지의 금주로 출발하였다.
소위 만주사변이 일어난지도 벌써 10년 전쟁은 점점 확대되어서 남·북 만주는 물론 북지와 남지 까지도 일본군이 출동하고있었으므로 병력이 부족하여 임시편성의 우도궁 사단까지도 출동하게 된 것이다.
그때 영친왕은 불현듯이 「하르빈」에 가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것은 「하르빈」역두에 있는 이등박문의 조난 현장과 안중근 의사의 의거 상황을 더듬어 보기 위함이었다.
이등박문은 한국침략외 제 1인자였고 영친왕을 직접 일본으로 데려온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영친왕은 은수를 넘어서 개인적으로는 항상 고맙게 생각하였으니 그것은 비록 일본의 국책으로 그 같은 일은 저질렀을 망정 고종황제와의 약속으로 자진해서 태자대사(황태자의 스승)가 된 책임감과 당시 겨우 여남은 살밖에 되지 않는 나 어린 영친왕에 대해 인간적인 애정으로 늘 따뜻하게 그를 감싸준 때문이었다.
그 반면 영친왕은 또 안중근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비상한 관심과 호의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것은 안 의사가 나라와 겨레를 위해서는 일신을 홍모와 같이 여긴 열렬한 애국자였다는 것과 여간해서는 잘 맞지 않는 권총의 보기 드문 명수였다는 점에서이다.
당시 이등을 수행했던 「나까무라가」쓴 수기에 『범인 안중근이 가지고 있던 권총은 7연발인데 그중 6발을 쏘아 3발은 모두 이등의 가슴 막에 맞고 1발은 수행원 「모리」의 팔과 어깨를, 1발은 「가와까미」「하르빈」총영사의 팔을, 또 1발은 「다나까」만철 이사의 다리를 꿰어 뚫었다』라고 쓰여있는 것을 보면 그 솜씨를 대략 짐작할 수가 있는데 이등박문을 만나러 일부러 「하르빈」까지 왔다가 그 사건을 목격한 당시 「러시아」의 대장대신 「코코브소프」가 일본 주재 「러시아」대사관에 보내온 전문에도 『범인은 한국인인 듯하며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심문 중에 범인이 말한 바에 의하면 그는 한국을 침략하고 황태자를 인질로 데러간데 대해 보복으로 이등을 죽이고자 「하르빈」에 온 것이며 그 암살이 성공된 것이 매우 기쁘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번 범인은 계획적인 것인 듯 하며 25일 「자자코프」역에서는 어떤 경관이 「브라우닝」 권총을 가진 거동이 수상한 세 사람의 한국인을 체포하였다. 그보다 먼저 「가와까미」일본 총영사로부터 「러시아」 측 경찰에 대해서도 이등공작이 도착 할 때에는 일본국민은 누구나 자유로이 「하르빈」 정거장 구내에 입장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는데 금번 이등을 암살한 한국인은 일본인과 비슷하여 도저히 구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것을 읽은 일이 있으므로 영친왕은 이등박문의 조난 경위와 안중근 의사의 사람됨에 대해서는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으나 실지로 「하르빈」에 와서 이등의 이 조난비에 서니 실로 감개가 무량하였다. 「하르빈」 역두에 있는 이등박문의 조난비는 그것을 뒤집어서 말하면 즉 안중근 의사의 의거 비라고도 할 수가 있는 것이므로 그 앞에 서 있은 영친왕의 가슴속에는 이등의 죽음을 조상하는 마음과 함께 안 의사의 의거를 찬양하는 정 반대의 생각이 서로 엇갈려서 형언할 수 없는 감회에 잠겼었다.
영친왕은 그후 약 1년 동안 북지 전선에서 활약하다가 태평양 전쟁이 점점 가열해지자 그 다음해에는 제1항공군 사령부로 전근되어 항공군 사령관이 되고 8·15 해방직전까지 군사 참의관으로 있었는데 일찌감치 지금엔 갈 수 없는 「하르빈」에 가서 비록 늦게나마 이등박문의 조난비와 안중근 의사의 의거 현장을 보고 온 것을 그는 늘 다행하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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