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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정치 기형…영·불 공동 통치|김찬삼 여행기 <뉴·헤브리디즈도서 제2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사파이어」 같이 파란 하늘 아래서 칠흑처럼 새까만 토인들이 녹색 「정글」속에서 나무 북을 두들기며 춤을 추는 「뉴·헤브리디즈」 제도는 과연 지상 낙원 같다. 이들은 자기를 다스리는 백인들이란 아랑곳없이 몸뚱어리에 울긋불긋하게 색칠을 하고 우리 나라 「강강수월래」 같은 윤무를 즐긴다. 이것은 고스란히 원시의 「리듬」이다.
이 원주민들은 거의 「멜라네시아」 인종인데 계급 없이 지내는 「아나키즘」의 사회를 이루고 있다. 이들에겐 지금도 이상한 풍습이 전해오고 있다.
우거진 느티나무 아래 제단을 만들고 거기에 사람의 목상을 세워놓고 그것을 떠받드는 미신이다. 이 제단에서 제사를 올릴 때에는 밤에 망령을 맞기 위하여 불을 피운다. 말하자면 초혼제가 되는 셈이다.
「산토」시의 영국과 「프랑스」 경찰 복장이 매우 대조적이었다. 같은 원주민 경관인데 영국계는 「카키」색 반팔 웃옷 반치마에 허리띠를 띠고 「베레」모를 썼으며, 「프랑스」계는 「프랑스」식 반소매의 웃옷과 반바지에다가 「드콜」 장군이 썼던 빵떡모자를 쓰고 방망이를 들었다. 이 두나라의 경찰이 함께 부두를 지키기도 하는데 매우 의좋게 종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두나라가 이 섬을 함께 다스리게 된데는 야릇함 이유가 있다. 이 제도는 17세기초엽「스페인」 탐험가가 「산토」섬을 발견했으나 18세기 중엽에는 「프랑스」 사람이 탐험했고 곧 이어서 이번엔 영국 사람이 이 제도의 대부분을 발견하고 조사하였던 것이다. 땅은 기름지고 우량도 많으며 또한 기후가 좋은 편이어서 19세기 후반에는 영국 사람이 먼저 농장을 개발하였고 이민을 보호해왔다.
그 뒤 「프랑스」는 여기에 와서 개발 회사를 설립하여 경제적으로 영국을 앞서게 됐다. 농장뿐만 아니라 지하 자원과 군사적인 값어치 때문에 서로 경쟁하면서도 이렇다 할 갈등 없이 두 나라가 「밸런스」를 잡으면서 1906년 이래로 지금까지 공동 통치를 하게 된 것이다. 「앵글로·색슨」과 「라틴」 민족- 특히 한때 백년전쟁을 일으켰던 영국과 「프랑스」이권을 둘러싸고 이렇게 의좋게 지낸다는 것은 약육강식의 원리에서 볼 때 하나의 기적이 아닐까.
「뉴·헤브리디즈」 제도의 남쪽에 있는 「에파테」섬에 있는 「빌라」시를 찾았다. 이곳은 정치의 중심지인 문화 도시로서 매우 아담한 바닷가의 도시다. 화가 「고갱」은 고작 「타이티」섬을 삭재로 했지만 이 섬의 자연이며 인물을 그렸다면 더 좋은 그림이 나오지 않았을까 했다. 남들은 「나폴리」를 절찬하지만 나는 왜 그런지 알려지지 않은 이 「빌라」시를 내세우고 싶었다.
「빌라」시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 관리를 위한 정책이 있는데 두 나라의 국기가 나란히 나붓 기고 있었다. 각각 독립된 기관과 공동 기관을 가진 공동 통치 기관으로서는 세계 유일이다. 이것은 정치의 기형아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전형 같기도 하다. 이 「뉴·헤브리디즈」 제도는 자연도 아름답지만 두 나라의 통치 형태가 「이집트」나 「로마」의 고적 못지 않게 훌륭한 「정치 관광 자원」이 되지 않을까 한다.
80개의 섬을 합쳐도 불과 1만5천㎢ 밖에 안될 뿐 아니라 인구가 겨우 7만6천명 (1967년 통계)인데도 세계 2대 강국인 영불이 놓칠세라 서로 놓치 않고 있으니 아마도 여기엔 말못할 큰 비밀이라도 있는가 보다. 「아프리카」 같으면 아무리 미개한 곳이라도 독립하겠다고 야단들인데 이 남태평양 제도들, 특히 이 「뉴·헤브리디즈」섬의 원주민들은 정치·사상이란 눈여겨보지 않을 만큼 도외시하고 있으니, 통치를 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어디 있으랴.
이 제도 가운데서도 특히 「산토」시가 있는 「에스피리투산토」섬은 높은 산이 있으며 온통 「정글」로 뒤덮여 있다. 이 「정글」의 모습을 알아보려고 산기슭에 얼마 들어가니 노랗게 무르익은 야생 「바나나」가 열려 있었다. 마침 공복이었던 참이라. 원숭이처럼 발발 기어올라가서 따먹었다. 그 향기와 맛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것을 고국의 여러분에게 맛보였으면 얼마나 좋으랴싶었다.
「바나나」를 따먹으며 자연미를 감상하는 기쁨을 어디다 비기랴. 「바나나」를 배불리 먹고 있는데 어떤 원주민들이 이쪽을 향하여 걸어오고 있었다. 혹 내게 무슨 박해라도 하지 않을까 생각되어 숲 속에 피하려고 했으나 발각되면 도리어 해로울 것 같아 내가 먼저 다가서며 얼굴이 찢어지도록 안면에 웃음을 띠며 (웃음이 아니라 찡그린 얼굴이 되었겠지만) 말을 건네었다. 그들은 적이 놀라긴 하면서도 빙그레 답례해 주었다. 원시적인 얼굴에 따뜻한 인간적인 미소를 짓는 것이 새삼스럽게 희한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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