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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남과 북의 형세(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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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남침 준비>④
북괴가 남침을 위해 군사력의 증강을 서두르는 한편 어떻게 민중을 조직 동원 선동했는가도 기록에 남길만 하다. 다음 증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북괴는 이미 남침 전에 직장 훈련대를 조직했고, 무기는 따발총을 자체 생산할 만큼 군수 공장을 차려 놓았고, 6·25 두달 전부터는 소련 탱크와 중장비를 거의 공개적으로 반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김혁씨(전 북괴군 대좌·함경북도 군사 동원 부장·현 멸공 의거 단장·48) 『북괴군의 창설이 공식으로 내외에 선포된 것은 1948년2월8일이지만, 이것은 명칭만 바뀌었을 뿐, 그 이전에 이미 경비대와 보안대 등의 군사력을 갖고 있었지요. 달라진 것이 있다면 군대의 명칭과 고장 색깔이 빨간 것으로부터 파란 것으로 바뀐 것뿐이지요.

<무정의 장군 칭호 박탈>
이때 이미 38 경비대는 소수이지만, T-34 탱크도 갖고 있었어요. 창군 작업은 소련 군사 고문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빈틈없이 감시, 감독했기 때문에 별 잡음은 없었던 것 같아요. 소련파·연안파·일군파 등이 간부로 임명됐는데 고위층끼리의 알력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밖에는 알려지지 않았지요. 그러나 한가지 공개된 사실은 팔로군 출신의 소위 「조선 의용군」두목인 김무정의 인기가 처음에는 아주 좋았어요. 그래서 「무정 장군」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당 중앙위 회의에서 문제가 되어 「장군」 호칭을 못 부르게 했어요. 북한에, 장군은 김일성밖에는 없다는 거지요. 모두가 김일성의 일인 독재를 구축하기 위한 공작이었지요.
북괴의 남침 준비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알고 있는데 창군 선포 후부터 본격화했읍니다. 이때부터 모든 무기 장비가 소련제로 대치됐고, 군사 교본도 소련 것을 직수입했어요. 1949년부터 탱크와 구경이 큰 포 등의 중장비가 소련에서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낮에는 「터널」에 숨겼다가 밤에만 운반했어요. 그러나 6·26 나기 두달 전부터 약 한달 동안은 낮에도 드러내 놓고 실어 왔지요. 한국에서 이 사실을 모르고 미리 대비를 안 했다면 너무 방심 한 탓이지요.

<대민 선박 공작을 강화>
그리고 그들은 군수 공장 건설도 서둘러 6·25 직전까지는 따발총·수류탄을 비롯한 개인 화기는 자체 생산할 수 있었읍니다.
전쟁 1개월 전에 팔로군 출신 한국인 장교 1개 대대가 만주 등지에서 차출되어 38선에 배치, 북괴군 지휘부를 강화했지요.
한편 50년에 들어 대민 선전 공작을 강화하여 각 직장과 동·부락 단위로 남한을 비방하는 각종 궐기·규탄 대회를 계속 열었지요. 미국에 대해서도 호된 비난을 가했고 6·25 직전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일부·남한 정계 요인의 체포령도 내렸지요.
그리고 1948년부터 북괴는 일종의 민병대 같은 직장 단위의 군사 조직체가 있었습니다. 소위 조국 호위 후원회 지휘 아래 현역 군관들이 배치되어 군사 훈련을 시켰지요. 백년 후반부터 군사 동원령이 발포되어 각 시·도 군사 동창 부장은 1년에 두 번 씩 청장년에 대해 신체 검사를 실시하고 기술·특기 등을 소상히 파악하여 카드를 만들도록 했지요. 언제든지 총동원 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춘 것입니다.

<직장 단위로 군사 조직>
6·25 전까지는 지원병제였지만 소위 민청에서 각 지역 단위로 회의를 열고, 쓸 만한 장정은 지원하도록 당과 군사 동원부에서 미리 조작을 했읍니다.
나 자신은 북괴군에서 대좌까지 진급했다가 휴전 후 제대한 다음 평양 방직 공장의 당 위원장으로 있던 중 62년에 미화 10만불을 갖고 남파되어 부산에서 간첩 생활을 하다가 모든 전비를 뉘우치고 자수했습니다. 지금은 오직 멸공 운동에 전심 전력을 다하고 있지요.』
한편 북괴 민족 보위성 지휘하의 이들 정규군과는 별도로 박일우가 이끄는 내무성 산하의 38 경비대의 남침 계획과 준비도 빈틈없었다. 이 38 경비대는 사실상 남침의 전초병이나 다름없었다.
이들은 6·25 전에는 38선 일대에서 부단히 작은 충돌을 도발하여 국군의 방어 태세와 전력을 사전 탐색했고, 전쟁이 나자마자 곧 2개 사단의 정규군으로 개편되어 남침 대열에 끼었다.
그러면 이제 이 북괴 38 경비대 대대장으로 있다가 6·25 때 역시 한국군에 귀순한 전 북괴군 고급 장교의 선언을 들어보기로 하겠다.
▲이재경씨 (전 북괴군 중좌·38경비 제3여단 제7대 대장<1948년8월까지>·현 경기도 고양군 중면에서 농장 경영·53) 『46년 말까지는 38 경비대란 황해도 보안 대대와 강원도 보안 대대의 2개 대대 밖에 없었는데 47년부터 경비 보안대의 강화를 서두르기 시작했지요.

<남침 전초는 38 경비대>
즉 이해 7월에 38선 일대의 경비 강화와 공작을 위해 경비 보안대를 대폭 확장했고, 1948년1월에는 본격적인 군대 성격을 띤 38 보안 여단을 황해도 사리원에 설치하고 각지에 분산했던 경비대를 통합하여 보안 제3여단으로 개편했지요. 이해에 강원도 간성에도 4개 대대로 38 경비 제1여단이 창설됐읍니다.
이 두 여단에서 38선에는 각각 3개 대대를 배치했지요. 1개 대대가 l천2백70명이니까 일개 여단 병력은 약 5천명 정도가 됩니다.
그때 황해도의 제3여단장에는 최현(현 민족 보위상)이가, 그리고 강원도 여단에는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김일성 직계의 새파랗게 젊은 「코흘리개」가 각각 임명됐어요.
48년6월에 김일성이가 내가 대대장으로 있는 해주의 제7대대를 방문한 적이 있어요. 도당 위원장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마중 나가려는데 김이 7, 8명의 괴뢰군 간부를 데리고 「세단」차로 들이 닥쳐요. 우선 식당을 보자면서 「검식함」을 쓱 열어 보더니 「이 정도면 괜찮다」고 큰소리칩디다. 그 다음에는 내무반에 들어가 친구도 보구요. 15분쯤 있다가 일선으로 간다고 나가 버렸어요.
뒤에 안 이야기이지만, 김일성은 그 길로 남천에 가서 여단장인 최현에게 몹시 기합을 주었대요. 한달쯤 후에 최현인가 그 아들인가의 생일 파티에 내가 갔더니 「글쎄, 그 애가 나보고 이 새끼 저 새끼 한단 말이야」하면서 기합 받은 분풀이를 하더군요. 지금은 몰라도 그때는 최현은 김일성을 절대 「장군」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뒤에서는 어린애 취급을 했어요.

<개전 후 정규군에 편입>
48년 8월에 결국 나는 소련파와 연안파의 알력과 가친이 왜정 때 고관을 지낸 탓으로, 대대장직에서 추방, 투옥됐다가 6·25 후에 풀려 다시 북괴군에 징발, 남파됐다가 귀순했지요.
이것은 이북에서 내가 투옥된 후에 생긴 일인데 1949년에 황해도 시변리에 제7여단이 새로 편성되어 38경비대는 도합 3개 여단으로 증강되었지요.
6·25 직후 38경비 3개 여단은 내무성 관할을 떠나 정규군 제7, 제8사단으로 개편되어 직접 남침의 주역을 담당했어요.』

<창군 작업은 극비리에>
6·25 전에는 이북에서 자유를 찾아 남하하는 수많은 피난민을 괴롭혀 울리고 체포 투옥하는 한편, 국군의 방어 상태와 전력을 치밀하게 정찰 평가했고, 전쟁 직후에는 정규군으로 둔갑한 북괴 38경비 보안대야말로 북괴의 계획적 남침을 가장 뚜렷하게 증명하는 존재라 하겠다.
한편 북괴의 초기 창군에 잠시 참여했다가 자유를 찾은 한 증인은 그들의 창군 작업은 극비 속에 진행됐으며 본격적 남침에 앞선 남한에 대한 유격전 강화가 정시할 문제였다고 말하고 있다.
▲박창암씨(5·16후 혁검부장·현 의정부에서 무명 농장 경영·48) 『그들은 8·15 해방 직후부터 1947년8월까지 진남포에 학원을 세우고, 정치·군사 간부를 단기 훈련시켜 냈지요. 물론 극비밀리에….
그해 8월부터는 소위 「인민군」을 창설하기 시작했는데 공식으로는 인민군이라고 안 했어요. 각지에 보안 간부 훈련 대대부 간판이 나붙었는데 이것이 바로 초기 그들 군대의 정체였지요. 「대대부」라는 간판이 붙어 있으니 외부에서 볼 때는 대대 정도의 병력이려니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때 이미 평북 개천과 함북 나남에 각각 1개 사단과 평양에 철도 경비 여단 및 중앙 경비대가 조직돼 있었습니다. 군 간부들엔 소련군·팔로군·일군 출신의 장교들이 임명됐는데 파벌 대립도 심했읍니다.
다음은 북괴의 대남 유격전에 대해서 한마디하겠는데 그들은 이남의 지하로 들어간 남로당과 북괴에서 남파한 「게릴라」로 하여금 대한민국의 후방을 철저히 교란시켜 놓고, 정면 남침하려는 기본 전략을 짰던 것입니다. 그래서 북괴는 수많은 간첩과 무장 유격대를 남파했지요. 하도 유격대가 들락날락했기 때문에 북괴는 6·25 전에 한국의 어느 요인 집이 어디서 어디로 이사했다는 것까지 죄다 알고 있을 정도였지요.

<일반은 초근 목피로 연명>
경제 사정도 모든 것이 전시 체제이니까 말이 아니었지요. 내가 월남한 48년께 그러니까 6·25 나기 2년 전인데 그때에 벌써 일반 국민은 초근 목피로 연명할 지경이었어요. 예를 들면 함경도 사람은 비료 한 가마를 평양으로 가지고 가 쌀 한 가마와 바꿔 오면 그 한 가마로 햅쌀이 날 때까지 1년 내내 온 식구가 살아야 했지요. 쑥이나 소나무 껍질을 함께 섞어 먹고 겨우 연명했어요.
비료는 배급을 주었는데 너희들끼리 요령껏 쌀과 바꿔 먹으라는 거지요.
요컨대 일반 국민의 모든 생활을 희생시키면서 남침 준비를 한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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