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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휴전 소언론인이 먼저 타진|NYT 설즈버거가 밝힌 한국전 휴전 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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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모스크바NYT동화】지금으로부터 20년전 1950년6월25일 북한괴뢰의 남침으로 말미암아 미국은 처음으로 국민의 지지를 못 받는 아시아전투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오늘날 아직도 4성장군의 명령아래 미군이 한국방위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전 자체는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전투가 중단되고 근본적으로 효과적인 휴전협정이 마련됐는지에 대해서는 덜 알려져 있다.
1950년12월30일 필자는 경우에 따라 언론의 한계를 벗어나 정치임무를 맡기도 하는 소련의 유력한 편집인 유리·주코푸의 요청으로 조촐한 만찬회에 참석했었다. 이 만찬회에는 미국무성 고문관을 지냈고 후에 주소미대사가 된 찰즈·볼렌과 당시 외교단으로 역시 후에 주소대사를 지내게 된 윌리엄·타일러가 참석했었다.
볼렌은 앞서 유럽문제담당 국무차관보 조지·퍼킨스와 협의, 이 모임에 대한 그의 승인을 얻었다.
주코프가 만찬에 이어 불어로 의견을 교환한 일반적인 토론과 후에 소련어로 직접 볼렌과 나눈 대화에서 비친 의사를 요약하면 소련은 미국과 양국회담을 갖기를 원하며 만약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소련은 단순히 선전을 위한 회담이 아닌 실질적인 4대국 회의를 원한다는 것과 중공과의 관계가 과히 좋지않으며 중공지원에 따른 경제문제는 막중하다는 점이었다.
당시 볼렌은 소련이 먼저 한국전의 휴전을 실현시키기 전에는 미국은 소련과 어떠한 문제도 토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전쟁에 굴하지 않고 필요하다면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미국민의 결의를 강조했다.
주코프·볼렌 단독회담에서 논의된 문제는 한국전뿐이었다.
다음날 저녁 볼렌은 회담이 매우 유익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주코프는 분명 소련정부의 사자역할을 했던 것 같다.
후에 유엔주재 소련대표 말리크대사는 중요한 연설을 했으니 공개적으로 한국전 해결책을 탐색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희미한 암시가 여기서 처음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 결과 말리크와 미국의 필립·제서크대사 사이에 비밀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1951년8월3l일 주코프는 필자에게 말리크의 한국평화에 관한 연설을 볼렌 만찬회의 결실이었다고 귀띔해주었다.
그는 『당신은 말리크가 38선에서의 해결책에 대해 볼렌이 제시한 노선을 따랐다는 사실을 몰랐었소』라고 묻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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