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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3. 끝없는 편력 <12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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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어느 날 점심을 먹고 그늘에 앉아서 담배 한 대를 태우다 말고 대위가 나를 툭 치면서 저리로 가자고 이끌었다.

-야, 우리 여기서 발르자.

대위가 이 공사장에서 달아나자는 소리인 줄 알아들었다. 사실 두어 달은 쌔빠지게 일해야 장마 때와 한여름철 공사의 지체 때문에 밀린 빚 까고 겨우 차비나 손에 쥐고 떠날 판이었다.

-나야 뭐 괜찮지만 형님이 뒤탈 없겠어요? 다른 데 가도 호가 날 텐데.

내가 그렇게 염려했지만 사정을 모르는 소리였다.

-내 대충 두꺼비 십장한테 일러는 두었다. 자재 분실로 처리를 할 거야.

그의 말에 의하면 십장들은 평소에 믿을 만한 일꾼들을 보아 두었다가 시멘트나 철근 같은 건자재를 빼돌리고는 떠나는 놈에게 분실 책임을 씌운다고 했다. 함바 빚이 있는 노무자에게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다.

대위와 나는 오후 휴식 시간에 서로 눈짓으로 일터를 빠져나와 우리 방으로 가서 짐을 싸 두었다. 그러고는 잠자리에 쓰던 담요만 방에 남겨두고 짐들은 함바 뒤의 풀 숲에 던져두었다. 그래도 저녁은 먹고 떠나야 하니까 남들보다 먼저 천막 식당에 들어가 앉았는데 두꺼비가 대위를 슬쩍 불렀다. 둘이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한참이나 쑥덕거렸다.

찬물에 더운 밥 말아서 짜디짠 간고등어 조림과 열무김치로 저녁 근사하게 먹고는 담배 한 대 태우고, 이제 방안의 담요 걷어다 떠나야 할 판인데 대위가 강변에 나가서 소주나 한 잔 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무언가 시간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강 건너 농부들이 사는 마을의 불빛들이 일찌감치 하나 둘 꺼지기 시작할 때쯤에 대위는 나를 데리고 함바를 멀찍이 돌아서 공사장 쪽으로 갔고, 너른 공터 뒤편에 있는 자재 창고 쪽으로 접근했다. 경비가 기다리고 있다가 손전등으로 비춰 보고는 문을 열어주자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 시멘트 부대를 날라다 리어카에 실었다. 그대로 앞뒤에서 끌고 밀며 함바 뒤편 언덕으로 올라갔고 우리 짐을 얹고 내가 방안으로 돌아가 담요 두 장을 걷어 왔다. 모두들 곤한 잠에 푹 빠져 있었다. 제각기 코 고는 소리며 이 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시멘트 부대를 가득 실은 리어카는 돌을 실었을 때처럼 무거웠다. 대위가 앞에서 끌고 내가 뒤에서 밀며 모래밭을 지나서 강변의 한길로 나서자 스리쿼터 한 대가 서 있었고 그 아래서 두꺼비가 담배를 태우며 기다리고 있다. 다시 우리와 운전수가 리어카에서 부대를 차의 화물칸에 옮겨 실었다. 다 싣고 나자 대위가 말했다.

-리어카는 여기다 두고 가우.

두꺼비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차비나 해라.

그가 대위의 뒷주머니에 돈 몇 푼을 찔러 주었다.

대위와 나는 강을 따라서 밤길을 걷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개구리와 맹꽁이 우는 소리가 요란하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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