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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해방에서 환국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간지 꼭 l년만에 순종황제가 세상을 떠났다.
1874년2월8일 창덕궁 관물헌에서 탄생하여 1926년4윌25일 대조전에서 서거하니 향년이 52세로 고종황제 보다도 15년이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영친왕은 순종황제의 병환이 심상치 않다는 기별을 받고 방자부인과 더불어 벌써 몇달 전부터 서울에 와있었으나 결국 상사를 당하고보니 형님되는 순종황제가 가엾기 짝이 없었다.
풍운이 급한 구한말 세상에 태어나서 하기 싫은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가 나라를 잃은 것도 분하겠거늘 어머님 명성황후는 말할 것도 없고 아버님 고종황제마저 비명횡사를 했을 뿐더러 사랑하는 아우와 누이동생까지 멀리 일본에 빼앗기고 말았으니 얼마나 가슴이 쓰리고 아팠으랴.
영친왕은 그 형님의 앞으로 왕세자가 된만큼 더우기나 마음이 슬펐으며 형님의 불행한 생애가 잘 이해되는 듯 싶었다.
순종황제의 장의는 국장으로 모시게 되어 그해 6월10일에 거행되었는데 고종때와 마찬가지로 창덕궁 돈화문앞에는 망곡하는 남녀노유가 그칠 새가 없었으며 조선일보의 민세안재홍은 『순종마저 가시다』라는 비장한 사실까지 써서 그렇지않아도 망극해하는 일반민중의 마음을 더욱 격동케 하였다.
그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국장날인 6월10일에는 돈화문에서 동대문까지 빽빽이 들어선 군중가운데서 갑자기 『대한독립만세』소리가 나서 미리 경계중이던 경관대와 충돌사건이 벌어지고 송학선이라는 청년은 창덕궁에서 자동차를 타고 나오는 경성상공회의소의 일본인 회두를 재등총독으로 잘못 알고 금호문앞에서 단도로 찔러 죽인 사건이 발생하여 큰 소동이 일어났는데 육·십 만세사건이라 함은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소동은 모두 구한국 최후의 황제인 순종의 죽음을 슬퍼하는 동시에 그 기회를 이용해서 조금이라도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표시하기 위함이었으나 창덕궁안에 있는 영친왕에게는 그보다도 홀로 남은 순종황후가 가엾어서 못 견디었다.
순종황후는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따님으로 순종의 초취부인 민비(의정부좌찬 민태호의 따님)가 세상을 떠난 후 13살때 그 후취로 황태자비가 된 분인데 순종이 병약하여 아기를 낳은 일이 없으므로 영친왕은 왕세자로 삼았던 것이다. 육·십만세사건은 그후 더욱 확대되어서 남녀 중등학교에서는 동맹휴학사건이 속출하였으며 그로 말미암아 경찰에 체포된 학생도 적지 않았다. 영친왕은 순종황제의 영구를 청량리 홍릉에 안장하고 차마 돌이키기 어려운 발길을 돌이켜서 다시 동경으로 갔는데 이때로부터 이씨조선 제28대의 왕통을 계승하게 되어 왕세자는 이왕전하로, 왕세자비는 이왕비전하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 실권이 없는 왕전하나 왕비전하는 도리어 귀찮은 일만 많아서 차라리 왕세자나 왕세자비로 그대로 있는 것만 같지 못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황족대우를 받으면서도 실상은 황족이 아닌 고충은 영친왕이 구라파여행을 계획했을 때에 드러났으니 종친들은 전하가 구라파에 가셔서 만일 상대편에서
『한국의 황태자로 대우를 해드린다면 일본측에서 좋아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순수한 일본황족도 아니시니 혹은 소홀하게 굴지고 모르므로…』라고 반대하였고 일본측에서는
『구라파의 여러 나라에서 일본의 사정을 잘 모르고 프린스·오브·리(이왕전하)를 프린스·오브·코리아(한국의 황태자)라고 잘못 부르면 큰 탈이니까….』
라고 반대를 하는 것이었다.
그에 대해서 영친왕은 『아니오. 나는 왕전하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가는 것이니까 어떠한 대우를 받아도 좋소』라고 단호하게 잘라 말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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