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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해방에서 환국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1923년 9월 초하루날의 일이었다. 그날 일본에서는 소위 관동 대진재가 일어나서 동경은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고 수만명이 불에 타 죽는 비극이 발생했다. 인심이 극도로 흉흉하여 눈이 뒤집힌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므로 일본 정부에서는 즉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그 대책에 부심하였는데 어디서부터 나온 말인지
『조선인들이 우물속에 독약을 넣었다.』
『조선인들이 불을 지른대.』라는 소문이 쫙 퍼지니 그렇지 않아도 집을 잃고 가족이 죽어서 환장이 된 사람들은 모든 불행은 조선사람 때문에 발생된 것처럼 『조선인을 모조리 때려 죽여라』고 악을 쓰고 덤볐다.
그 때문에 당시 조선 유학생이나 노동자가 수천명이나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나중에 판명된 일이지만 일본 정부의 미스노육군대장등이 가장 염려를 한 것은 큰 지진으로 말미암아 집을 태우고 가족들을 잃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나 무정부 주의자에게 선동되어 혁명을 일으키지나 않을까하는 문제였었다. 그리하여 눈이 뒤집힌 민중의 심리를 딴 곳으로 돌리게 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애꿎은 조선사람에게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씌운 것이었다.
무정부주의자 박렬씨가 일본 천황을 죽이려했다고 소위 대역죄에 걸려서 그의 애인 가네꼬·후미꼬(김자문자)와 함께 체포된 것도 그때이고 역시 무정부주의자로 일본의 대표적 존재였던 오오스기·사까에가 그의 애인과 나어린 조카와 더불어 헌병대장 아마까스대위에게 목을 죄어 참살된 것도 다 그때의 일인데 어느 것이나 혁명을 두려워한 하나의 비상수단이었음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 영친왕과 방자부인은 참을 수 없는 슬픔과 분노를 느끼었다. 그러나 영친왕은 자기 자신도 조선사람인 점에서는 틀림이 없었으므로 더구나 어떻게 할 수가 없었으며 비록 일반 민중들과는 다르다고 하지만 또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므로 일주일 동안이나 궁성안으로 피난한 일까지 있었다.
그때의 영친왕과 방자부인은 자기들은 비록 민족과 국경을 초월해서 애정과 이해로 부부가 되었지만 한국과 일본의 두 나라 사이에는 동경 대진때 조선인 학살사건으로 말미암아 메울 수 없는 큰 홈이 더 한층 커진 것을 뼈저리게 느끼었다. 따라서 한국과 일본사이의 숙명적인 대립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두 사람의 애정만은 그에 좌우되는 일이 없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구왕실이나 구왕족의 운명은 완전히 조선총독부와 일본궁내성에서 장악하고 있어서 자주성이라고는 조금도 없었으니 우선 덕혜옹주의 결혼문제만 보아도 잘알 수가 있다.
원래 일제와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족을 극력 일본에 동화시키는 동시에 왕공족의 피에다 일본인의 피를 섞는 것을 조선통치의 근본으로 삼았었다.
임진왜란때의 도요또미·히데요시도 조선에서 일본군대를 철수하는 조건으로 ①왕자를 인질로 보낼 것 ②두 나라가 서로 국혼을 할 것 ③충청 전라 경상의 삼도를 일본에 줄 것등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일이 있었는데 3백여년이 지난 뒤에 필경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된 것으로 그들은 영친왕의 결혼만으로는 만족하지않고 단하나 밖에 없는 누이동생 덕혜옹주에까지 손을 뻗치게 된 것이었다.
덕혜옹주는 그때 아직 소학교 6학년생이었는데 영친왕과 마찬가지로 역시 어려서부터 일본에 동화시키려고 하였었다.
그 말을 듣고 큰 오라버님되는 순종황제는 너무나 애처롭게 생각하여 극렬반대하는 동시에 『적어도 여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슬하에 두고 싶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잃은 전황제로서는 한낱 헛된 저항에 지나지 않았고 시계처럼 정확하게 진행되는 그들의 계획에는 아무런 변경도 가져오지를 못하였다.
그리하여 덕혜옹주의 생모 귀인 양씨는 필경 엄비모양으로 일본으로 끌려간 딸자식을 그리워만 하다가 다시 한번 만나보지도 못하고 청주 친정에서 유암으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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