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3)해방에서 환국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영친왕의 정략결혼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민규수였다.
민규수는 당시 주영공사를 지내고 승후관으로 있던 민영돈씨의 큰 따님으로 영친왕이 일본으로 건나가기 직전에 장래의 영친왕비로 내정되었던 민갑완여사인데 만일 한-일합병이 되지않고 국권이 그대로 있었더라면 명성왕후와 순종비의 뒤를 이어서 제3의 민비가 탄생하여, 혹은 여흥민씨네의 세도가 또다시 부활했을지도 모르나 운명의 신은 또다시 그것을 허락하지않았다. 그것은 일제가 왕실의 혼사는 반드시 천황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유로 간택된 사실을 절대비밀에 붙이는 동시에 약혼을 강제로 파괴한 때문이니 영친왕이 동경에서 화촉을 올리게 된 이면에는 민규수라는 만년 처녀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봉건시대의 유습으로 한 번 왕비나 왕세자비로 간택되었던 여성은 설사 그 혼인이 성사가 되지않았다고 하더라도 다른데로 시집을 가지못하는 습관이 있었으므로 민규수도 역시 생과부로 평생을 늙지않을 수 없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약혼이 성립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파혼이 되어서 다시 태어나기 어려운 귀중한 일생을 의미없이 만년 처녀로 허송세월하게 되었으니 그런 억울하고 분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민갑완여사는 그의 유저 『백년한』에서 간택과 파혼의 경위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열한살되던 해 정초의 일인데 하루는 남치마에 옥색저고리를 입고 또야머리에 첩지를 쓴 궁인 세사람이 우리집에를 왔다. 한 분은 영친왕님의 유모이고 두 상궁이었다. 어머님께 정중히 인사말씀을 올리더니 『아시는 바와같이 왕세자님의 간택을 하실 의향을 가지시고 간택단자를 돌리라고 하시와 보모(유모)와 같이 가지고 나왔사옵니다.』라고 하며 상궁 분이 다홍색 간지를 내놓았다. 민간에서는 혼사말이 있으면 남자집에서 여자집으로 사주라는 이름으로 생월생시를 써서 먼저 보내오건만 나라법은 그와는 달라 비를 책봉하려면 간택단자라는 것을 만들어 들여가게 마련이다. 간택단자는 검은 붓글씨로 간택에 참여할 처자의 들어가는 것이다.
간택되던 날-그날이 와서 나는 사인교를 타고 덕수궁으로 들어갔다. 나와같이 들어온 처자가 무려 1백50여명이나 되어서 그런지 간택은 좀처럼 끝나지않았다. 해는 서산을 넘은지 오래여서 바깥은 캄캄하고 전안에는 전등불이 환하게 켜졌다. 나는 다리가 아프고 짜증이나서 옆에 앉은 상궁을 흔들었다. 상궁은 깜짝놀라면서
『처자, 왜 그러십니까?』하고 묻는다.
『상궁, 다름이 아니구요. 오늘이 간택날이라는데 신랑될 분이 누구신가요』하고 수줍음도 없이 묻자 상궁들은 나의 깜찍한 질문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마침 그 때였다. 초조한 안색을 하신 귀인마마(엄비)께서 또다시 전안으로 나오시었다.
우리는 다시 상궁의 부축을 받고 일어섰다. 귀인마마께서 나의 앞으로 오시자 나를 부축하던 상궁은 웃음을 참으며 『마마, 기특한 질문이 하나있사옵니다.』
『무슨 말이냐?』
『이 처자가 오늘이 간택일인데 신랑이 누구시냐고 질문을 했읍니다.』
『뭐라구 어디보자. 아, 승후관 민공의 딸이구나. 그래 너는 아버지 보고싶지 않으냐?』
『왜 안보고 싶겠어요? 무척 뵈옵고 싶습니다.』
『그래. 넌 대답두 잘하고 아주 총명하게 생겼구나. 그래, 신랑감이 꼭 보고싶으냐?』
『네.』하고 고개를 수그리자, 귀인마마께서는 내 손목을 잡으시고 소파앞으로 가시었다. 그곳에는 세분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모두 사촌·육촌들이었다. 영친왕님은 그때 복건에 초립을 쓰시고 연두 두루마기에 남빛 전복을 입으셨다. 나하고는 생일까지도 같은 동갑장이 열한 살의 아기인지라 그분도 세상을 모르는 듯 소파에서 뛰어놀고 계시었다. 나는 그분과 함께 뛰어놀고 싶은 충동을 가슴에 품은 채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는데 그분은 아침부터 나와서 고생을 치른 우리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대로 천진하시기만 했다.
귀인마마께서 손목을 끄시자 소파에서 내려서신 그분은 귀인마마의 바른 손을 잡으시고 나는 귀인마마의 왼손에 잡히어서 대전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분과 나는 등을 마주대고 키를 재보았으나 내가 그분보다 한치 가량 더 컸다. 그때 나는 어쩐지 마음이 서운하였다. 『남자분이 왜 여자보다 작으실까?…』하고.<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