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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해방에서 환국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이본궁 수정왕은 신문호외를 읽으면서 이거 큰일났군. 독립만세로 조선은 매우 소란한 모양인데라고 걱정스럽게 말하자, 옆에있던 부인도 그러기에 내가 무어라고 말했어요. 인정 풍속이 다른 이방인과의 혼인은 암만해도 재미가 없다고 하지않았어요. 그래서 결국 따님을 불러다 놓고 "이번 혼인은 국가적인 배경으로하는 일인만큼 만일 한·일 양국관계가 악화했을때에는 매우 곤란할 터인데 그래도 이왕가에 시집을 갈 터이냐?"라고 물었다. 방자왕녀는 뜻밖에도 "아무 걱정마세요. 설사 나라와 나라사이가 악화되더라도 저는 그분을 믿을 터이니까요."
『그건 무슨 소리냐?』
『아무리 정략결혼이라도 저는 이왕전하 개인에게 시집을 가는 것이지 한국이라는 국가에 시집을 가는 것은 아니니까요』하고 말하니, 수정왕도 무릎을 치며 "딴은 그래. 너의 말도 옳다. 그러면 그분이 돌아오는대로 다시 택일을 해서 속히 결혼을 하도록 하지…." 그리하여 새로 택일된 것이 그 이듬해(1920년) 4월28일이었다. 그 당시의 일을 방자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나긴 2개월만에 왕세자님이 서울로부터 돌아오셨읍니다.
『이번에는 초종을 치르시느라고 얼마나 삐치셨겠읍니까?』하고 인사말씀을 드리니까, 『나는 괜찮소만 당신에게 실례를 끼쳐서 미안하오.』
나를 깊이 아껴주시는 뜻이 그 말씀이상으로 두 눈에 깃들어 있었읍니다.
두 나라 사이는 어떻게 되든간에 왕세자님과 나는 굳게 결합되어있다는 실감이 강렬하게 가슴에 치밀어서 흐뭇한 생각에 젖었읍니다.
그 시대의 황족이란 결혼하기전에 한두번 만나는 것이 고작이었읍니다만, 우리들은 비교적 자유스러워서 일요일이면 가끔 초청하시기도 하고 또 내가 찾아가 뵈옵기도해서 즐거운 시간을 가질수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서로 이해를 깊이할 수가 있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읍니다.
그해도 지나 l920년 봄 대망의 날이 닥쳐왔읍니다. 4월28일, 이날이야 말로 왕세자님과 내가 영원히 결합되는 날이며, 또 그로 말미암아 한국과 일본의 왕실이 굳게 맺어지는 날이었읍니다.
양친께 작별인사를 드렸을때에는 그래도 시집가는 날답게 마음이 센티멘털해져서 가슴이 메어지는 듯 했읍니다.
양친께서도 심정은 마찬가지신듯 눈에 눈물을 빚어내시면서 『나라와 풍속이 다르므로 괴로운 일도 많겠지만 너에게 지워진 중대한 사명을 잊지말도록 하기바란다. 그리고 우리집안 이름을 더럽히지않도록 노력할 것이요, 훌륭한 왕비가 되어주기 바란다』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도리이사까(조정판)왕세자댁에 당도하니까 이미 황족대표가 모두 와있었고 궁내대신 이등공작(이등박문의 아들)부처등 많은 사람이 와있었는데 이왕가에서는 순종황제의 칙사로 이달용 후작이 참석하였읍니다.
황족의 결혼에는 예전부터 입는 옷이 따로 있었으나 이번만은 특례로 왕세자님은 육군소위의 예장을 하시고 나는 양장으로 결혼식을 하였는데 나는 그저 실수만 없도록 힘쓰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슴에 단 훈장과 머리에 쓴 관이 상징하고 있는 한국왕비로서의 무거운 책임감을 뼈속 깊이 느끼고 있었읍니다.
결혼식만 무사히 끝내고 신혼생활은 우선 무난한 편이었습니다. 미리 염려한 것처럼 습관의 차이로 말미암아 감정이 빗나가는 일도 없었고, 내가 한두마디씩 말하는 서투른 한국말도 도리어 애교가 되었읍니다.
결혼당시의 그 즐거움이란 누구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우리의 경우는 그 행복감이 더한층 절실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사람이 다 특수한 환경에 태어났고 특히 왕세자님은 가정적으로 심한 역경속에서 성장하셨으니까 신혼의 행복이 더 한층 즐거웠던 것은 물론입니다.
결혼한지 반년쯤 지나서 태기가 있었읍니다.
『이제 나는 어머니가 된다』는 즐거움속에서도 일종의 긍지와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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