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본사 사회부 눈에 비친 그 실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지난해 9월 의사국가고시에 합격하기 위해 70만원의 뇌물을 주려던 무면허의사 정경식씨(55)를 검찰에 고발한 국립보건연구원 고시과장 이충식씨는 모범공무원으로 매스컴의 각광과 함께 일반의 찬사를 받았다.
불길 속을 뚫고 들어가 생명과 재산을 건져낸 소방사, 물에 빠진 사람을 익사 직전에 구해준 수장경찰관, 죽음직전의 환자를 자기가족처럼 돌본 적십자 회원의 이야기 등 사회신의의 모범도 많다.
국가공무원으로서 또는 봉사대원으로서 국민에 대한 신의를 지켜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다는 지 극히 당연하기만 했던 이들의 행위가 어째서 화제가 되는 것일까?
남을 속이지 않고 믿음과 의리를 심게 해 준다는 것은 요즘 사회풍토로선 지극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2월 의사국가고시에 응시한 고 모씨 등 6명은 합격할 자신이 없자 당시 보건연구원 고시과장 이태근씨(43)등 공무원 4명에게 20∼40만원씩을 주어 백지답안지에 답을 써넣게 하여 모두 구속됐다.
같은 달에는 서울대 약대생들이 약사국가고시문제가 출제의원에 의해 누설됐다는 이유로 시험을 거부했고 지난 2월 제25회 의사 국가고시 때도 돈을 받고 해답이 적힌 쪽지를 응시자들에게 돌려줘 커닝을 하게 한 시험감독관 박광호씨(39)등 공무원 4명이 구속됐다.
인간의 생명과 건강을 다루는 의사를 뽑는 국가고시에까지 부정이 있다는 것은 수술이나 주사를 잘못하여 억울하게 환자의 목숨을 잃게 하거나 처방전에 따르지 않고 함부로 조제한 약을 환자에게 주어 부작용을 일으키게 하는 엉터리 의·약사의 행위와 함께 국민에게 인술마저 믿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기·협잡·횡령·불륜 등 1대1의 관계에서 신의를 지키지 않는 예는 피해자가 국한되어 있고 너무나 흔한 일이라고 쉽게 보아 넘길 수 있는 사람들도 공무원·경찰관·법조인등 공공기관종사자나 부정고발과 사회선도역할을 맡은 매스컴 종사자들의 신의를 저버린 행동에는 깊은 관심을 나타낸다.
지난 12일 서울 용산 경찰서 한 모 순경(35)은 통금시간이 넘어 집에 데려다 준다면서 모 여중 2년 김 모양(15)을 여관으로 데려가 욕을 보였고 서울시경근무 지 모 순경은 담에 소변을 보다가 이를 말리는 김 노파(67)를 오히려 건방지다고 때려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66년3월 소매치기단 백식구파를 검거했을 때는 서울시내 7개 경찰서 25명의 경찰관이 소매치기로부터 81만원의 뇌물을 받고 눈을 감아왔다는 사실이 밝혀져 국민을 놀라게 했다.
작년 한햇 동안의 비위공무원은 적발된 것만 해도 전체의 2%인 7천5백72명에 이르렀는데 이 가운데 일반직공무원이 4천3백39명, 경찰직 공무원 3천47명, 교육공무원이 1백36명이었다.
서로 믿는 가운데 손을 잡고 학교를 세웠던 서울은혜국민학교의 재단 측과 고모교장의 알력은 신의를 배반한 가까운 실례이다. 법조계 역시 예외는 아니다.
작년2월 1백10만원 짜리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맡은 L변호사는 7만원의 착수금을 받고도 현재까지 법원에 제소조차 하지 않았는가 하면 원고와 피고 쌍방으로부터 수수료를 받고 법정 화해한 것처럼 꾸며 일방에 승소케 해준 일도 있었다.
L씨는 담당판사에게 교제비를 주어야 한다고 속여 1백만원을 받은 사건으로 결국 구속되었으나 이 같은 신의를 저버린 행동은 법원과 검찰에까지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기게 했다.
가장 신의를 존중해야할 위정 당국자나 국회의원들이 부정을 저지른다든지 정치소신을 밥먹듯이 번복한다든지 공약을 공약으로 일삼는다든지 하는 일들은 불신사회를 조장하게 마련이다.
6·8선거 때 모 구에서 모 후보가 내세운 공약은 모두 3백54건이었는데 이를 실현하려면 무려 1백22억원이 필요한 것이었다. 『지역개발을 위해 국가예산이 부족할 때는 개인재산을 보태겠다.』『역사를 새로 지어 특급열차를 정거시키겠다.』『속초∼춘천사이에 철도를 놓겠다』는 등 헛 공약은 한 걸음 더 나아가 1개의 종합제철공장부지가 동시에 네 군데로 결정됐다는 주장이 나오는가하면 여수에서 기공식까지 한 제2정유공장을 인천으로 끌어오겠다는 엉뚱한 소리까지 낳게 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