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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구왕실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씨가 지난 63년 11월22일 환국이래 줄곧 병상에 누워 있다가 약 6년반만인 지난 1일 73세를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난 것은 이미 널리 보도된 바와 같거니와 하마터면 이역의 고혼이 될 줄 알았던 영친왕이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와서 비록 한마디의 말은 남기지 못했을 망정 일본인이 아닌 떳떳한 한 한국인으로서 왕자의 명예와 위엄을 간직한채 연고 깊은 창덕궁에서 최후의 숨을 거두고, 더구나 아버님 되는 고종황제의 무덤이 있는 금곡 왕릉에 그의 만년유택을 마련하게 된 것은 불행중 다행이라고 할까? 비운의 왕자,「고독의 왕자」, 영친왕의 넋도 이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어 쉬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친왕이 일시의 착오로 취득했던 일본의 국적을 버리고 다시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오기까지에는, 해방후 20여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 사이 영친왕에 대한 인간적인 동정에서 또는 민족적인 체통을 생각해서 영친왕에게 귀국을 열심히 권고하고, 그 일을 위해서 직접간접으로 또는 물심양면으로 진력해준 이는 한-일 양국에 걸쳐서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바 우선 우리나라의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대표적인 인사라고 할 것이다.
나는 일본과의 왕래가 극히 어렵던 때에 모신 문사특파원으로 동경에 가 있었던 관계로 영친왕을 알게 되었고 영친왕을 알게 됨으로써 지금까지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그분의 귀국을 위해서 다소나마 노력한 바가 있으므로 영친왕이 세상을 떠난 이 마당에 있어서 지금까지의 경위를 일단 정리해서 보고하는 것은 신세를 진 분들에 대한 의리로라도 나의 하나의 의무라고 생각되므로 이에 감히 붓을 들어서 그 진상과 비사를 쓰려고 하는 것이다.
영친왕은 한양조 제26대왕 고종황제의 제3왕자로서 엄비의 소생이다. 해아밀사 사건으로 인하여 일제의 강압으로 고종황제가 억지로 책임을 지고 양위케 되어 제1왕자인 순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국법에 의해서 자손이 없는 형님의 뒤를 이어 왕세자가 된 분이다. 고종황제에게는 4남매의 자녀가 있었으니(본래는 7남매) 정실인 명성황후(민비)는 큰아드님 순종 밖에는 낳지 못하였고, 둘째 아드님의 친왕(의친왕·전 이강공)은 장귀인이, 세째 아드님 영친왕은 엄비가, 막내 따님 덕혜옹주는 양귀인의 몸에서 각각 난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고종황제는 막내 아드님인 영친왕을 유난히 사랑하여 장래를 크게 기대한바있었으나 그때는 이미 국운이 기울어져「일제」의 침략이 본격화하였고 간악한 그들은 허울 좋은 인질로 영친왕을 요구하였었다. 즉「왕세자」를 잘 교육시키려면 일본으로 데려가야만 한다고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고종황제는『그게 무슨 소리냐?』고 완강히 거부하였지만 일제명치는 짓궂게 조르며 나중에는 칙어까지 내려서 이등박문을 태자태사로 만들어 『왕세자의 신변은 절대로 보장하겠으니 안심하고 보내라』고 맹세까지 하게되니 그처럼 반대하던 고종황제도 강약이 부동이므로 하는 수 없이 영친왕을 일본으로 보냈던 것이다. 때는 1907년-합병되기 3년전이요, 영친왕의 나이 열한살때의 일이었다.
일본으로 간 영친왕은 이왕전하라고 해서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극진한 대우를 받았었다. 「일제명치」는「고종」과의 약속도 있고 해서 동경「도리이사까」(조거판)에다 광활한 왕저를 제공하고 내탕금을 많이 지출하여 그들의 황족들보다도 오히려 여유있는 생활을 하게 하였다. 그 모든 것이 일제의 사탕발림인, 정략에서 나온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미구해서「일제」는 그 본성을 드러내어서 고종황제의 참뜻을 배반하고「나시모도노미야」(이본궁)「마사꼬」(방자)왕녀와 결혼을 시키고야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그보다 먼저 왕세자비로 책정되었던 민규수(백년한의 저자 민갑완 여사)는 정략결혼에 희생되어 일생을 만년처녀로 늙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도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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