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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풍요의 시대 거침없는 청춘들 허세를 싹둑 자르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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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1 전후 베이비부머는 1960년대 소비의 주역으로서 미니스커트를 당당히 입었다.
2 크리스찬 디올의 뉴룩(New Look)은 여성성을 강조한 파리의 고급 오트 쿠튀르 패션이다. 3 매리 퀀트가 런던의 킹스 로드에 연 바자 매장 앞에서 미니스커트를 입은 젊은 여성들이 모델 흉내를 내고 있다.
4 일회적 재미를 추구하는 팝아트 가구가 1960년대에 유행했다. 이 시기에는 미술과 패션은 물론 가구 분야에서도 자유로운 정신과 재미를 추구했다.
5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모델 트위기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막대기’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깡마르고 소녀같은 이미지를 지녔다.

경제가 불황일 때 치마 길이가 짧아지고 미니스커트가 유행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지만 이만큼 엉터리 속설도 없을 것이다. 미니스커트는 서구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196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미니스커트는 패션의 역사에서 전후의 대중에게 다가간 패션, 젊은 세대가 이끄는 패션, 일회적 재미를 추구하는 패션, 그리고 가슴이 작고 깡마른 체구를 가진 패션모델의 등장과 같은 새로운 시대의 패션을 상징한다.

미니스커트를 추적하려면 1950년대 영국으로 가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만큼이나 폐허가 된 국가는 영국이다. 폭격으로 많은 것을 잃었을 뿐 아니라 마음에도 큰 상처를 입었다. 기성세대는 전시의 내핍 생활에 길들여졌고, 전후에도 의기소침해 있었다.

반면 그들의 자녀는 달랐다. 전후 미국의 원조와 경제 재건에 대한 열망이 절정에 달아올랐다. 전쟁이 끝나면서 베이비붐이 시작됐고, 1950년대가 되자 서구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오늘날과 같은 복지제도가 갖추어졌고, 평균 임금은 1950년대 후반이 되자 1950년대 초반보다 무려 두 배 가까이 올랐다. 또 실업자가 없는 완전고용 상태가 지속됐다. 1940년대 태어나 전쟁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거나 전쟁을 전혀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세대는 그들의 부모와는 천지차이와도 같은 환경에서 성장했다. 이들은 곧 새로운 소비문화의 주역이 되며 대중문화와 디자인 트렌드를 이끌게 된다.

영국 신예 디자이너 매리 퀀트의 반란
영국의 젊은 세대는 전쟁으로 인한 내핍 시대의 산물에 진절머리를 쳤다. 특히 실용적인 바지에 대해. 그렇다고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여성스럽고 우아한 스타일에도 반대했다. 전후 프랑스에서는 이런 고급 오트 쿠튀르 패션이 크리스찬 디올에 의해 재현되었다. ‘뉴룩(new look)’이라는 전후의 새로운 스타일은 유니폼으로 획일화된 전쟁 시대에 대한 반발로 여성의 곡선미를 다시 살리려고 했다. 개미허리처럼 여성의 허리를 잘록하게 해주었고, 그와 대조적으로 풍성한 치마를 입혀 여성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했다. 뉴룩은 여성의 몸을 제한해 불편해 보였고, 사치스러운 패션이었다.

패션을 파리 상류사회의 전유물로 여겼던 영국의 신예 디자이너 매리 퀀트(Mary Quant)에게 뉴룩은 과잉되고 불필요하며 극소수를 위한 것으로 보였다. 전쟁의 내핍도 아니고 호화 사치는 더더욱 아닌 새로운 패션이 그때까지 패션의 변방이었던 런던에서 태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풍요로운 시대의 젊은이들은 구매력이 높았다. 그들은 과거 모더니즘의 엄격함에 싫증을 냈다. 그들은 경제와 과학기술과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생각을 가졌다. 경제적 풍요를 배경으로 자유와 독립을 갈망했고 다양한 사고에 대해 관대했으며 록 음악에 열광했다. 이들을 위한 새로운 상품 역시 발랄하고 솔직하고 무엇보다 재미와 재치가 있었다. 영국의 피터 머독이 디자인하고 1963년에 생산한, 판지를 접어서 조립하는 일회용 의자는 이런 시대의 대표적인 아이콘이다. 이 시대의 진보란 일회적이고 싸고 거추장스럽지 않고 쉽게 폐기해버릴 수 있는 것이다.

미술도 고상한 엘리트의 전당에서 내려왔다. 주변에 널린 상품과 대중문화에서 자양분을 빨아들인 팝아트가 신성한 추상표현주의를 밀어낸 것이다. 고급 오트 쿠튀르의 파리와 달리 새로운 패션의 중심지 런던은 이런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시대정신을 추구했다.

깡마른 체형이 패션 모델 새 표준으로
매리 퀀트는 대학을 졸업한 뒤 1955년 런던 킹스 로드에 자신의 첫 번째 매장 바자(Bazaar)를 열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상류사회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친구들을 위해 옷을 디자인했다. 편안하고 헐렁한 튜닉 드레스(tunic dress), 달라붙은 바지인 힙스터 팬츠(hipster pants)처럼 10대들이 즐겨 입을 만한 시장 물건들이었다.

아울러 무릎을 드러낸 짧은 스커트를 내놓기에 이른다. 영국에서는 이것을 ‘미니스커트’라고 불렀다. 무릎 위까지 다리를 드러내는 미니스커트는 자연스레 팬티스타킹의 유행을 함께 불러왔다. 이 젊은 패션에 대한 당시 반응은 매리 퀀트의 다음과 같은 증언이 잘 대변해준다. “우리 가게 진열창에 전시된 미니스커트와 스타킹을 본, 중산모자와 양산을 쓴 도시의 신사숙녀들은 창문을 우산으로 탁탁 치면서 ‘에이, 몹쓸 것들’ ‘역겨워!’라고 했지만 그러면 뭐하나? 손님들은 끝없이 몰려 들었는걸.”(매리 퀀트의 『여자를 완성한 여자, 매리 퀀트』 중에서)

바자가 있는 킹스 로드는 미니스커트의 중심지가 되었고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미국의 ‘타임’지는 ‘런던: 역동적 도시(London: The Swinging City)’라는 특집 기사를 만들었다. ‘에스콰이어’ ‘라이프’ ‘보그’ 등이 앞다투어 소개했고, 배우 오드리 헵번, 사진작가 리처드 아베돈,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 같은 명사들이 바자를 방문했다. 이탈리아의 거장 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영화 ‘욕망(Blow up)’(1966)을 통해 자유분방하고 새로운 패션으로 넘실대는 런던을 묘사했다.

매리 퀀트와 미니 스커트는 또한 모델의 표준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1960년대의 수퍼모델인 진 슈림튼과 ‘세상에서 가장 비싼 막대기’란 별명을 가진 트위기 같은 모델들은 모두 가슴이 작고 호리호리한 몸매에 커다란 눈을 가진, 10대 소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전 시대의 성숙한 숙녀는 완전히 새로운 소녀 스타일로 대체되었다. 매리 퀀트는 이런 성숙하지 않은 깡마른 소녀들이 춤을 추는 파격적인 패션쇼를 선보이며 미니스커트를 전 세계로 전파했다. 젊은 여자들은 물론 가정주부, 귀족과 상류층의 숙녀들도 미니스커트를 받아들였다.

매리 퀀트와 1960년대 런던의 새로운 패션은 기존의 엘리트주의 패션, 부유한 사람들만을 위한 허세의 패션, 형식에 얽매인 관습적인 패션을 땅으로 끌어내려 돈이 없는 사람들, 매장의 여점원들, 젊은이들도 충분히 구입할 수 있는 옷을 만들었다. 이로써 패션은 대중화되었고 민주화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미니스커트라는 파격적인 스타일을 낳았다. 이는 1960년대라는 인류 역사상 경제적으로 가장 여유롭고 자유와 평등을 갈망하고 실현했던 시대의 산물인 것이다.



김신씨는 홍익대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7년 동안 디자인 전문지 월간 ‘디자인’의 기자와 편집장으로 일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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