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귀식의 시장 헤집기] 만무근린<萬無近隣>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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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호 29면

이웃 나라와 친하게 지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유럽에서는 수많은 전쟁이 일어났다. 독일과 프랑스 사이가 특히 그러했다. 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다. 공산화한 중국만 해도 이웃 나라와 벌인 전쟁이 어디 한둘인가. 베트남·인도·소련, 그리고 한반도에서도 전쟁을 했다.

한국과 일본 사이는 어떤가. 임진왜란과 1910년의 강제 병탄이 아니더라도 일본이 한반도를 침탈한 게 900여 회에 이른다는 주장이 있다. 대규모 침략 계획을 세웠다가 실행에 옮기지 못한 예도 있다. 백제가 멸망한 지 100년쯤 흐른 761년에 세워진 신라 정토(征討) 계획, 13세기 몽골·고려 연합군에 맞선 고려 침공 계획이 그러했다. 국가 차원의 침공과 차원은 다르겠지만 고려 말 이래 왜구의 한반도 노략질은 끊임없이 되풀이됐다. 왜구의 마수는 한반도뿐 아니라 중국 해안 지방과 동남아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일부 일본 학자는 ‘왜구 중엔 중국인·조선인 등이 섞여 있었다’는 물타기 주장을 편다. 약탈만 한 게 아니라 동아시아의 교역담당자 역할도 했다며 일본인의 해외진출이나 해상활동이라는 측면으로 접근하기도 한다. 일본 입장에선 바다를 장악한 왜구야말로 일본이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하는 데 길잡이 역할을 했다고 믿고 싶을 거다. 왜구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섬을 비우는 공도(空島) 정책을 편 중국, 이를 따라 한 조선은 바다에서 오는 서양 손님들을 반기지 않았다. 바닷길을 거부한 채 육지에 웅크리고 사는 체질이 굳어졌다. “아시아 각국 사람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겼다”는 일본 정부의 과거사 언명은 20세기의 식민지배와 침략 행위에 대한 것이지만 일본 밖의 아시아 사람들에게는 1000년 넘는 왜구의 약탈을 떠올리게 한다.

일본이 역사적으로 그런 나라였건만 동아시아 국가들은 경제 분야에서 일본과 서로 분업하고 협력하는 체계를 발전시켜왔다. 정경 분리다. 역사·영토 갈등을 놔두고 경제의 상호 의존도를 심화시켰다. 세계적으로 볼 때 한·중·일, 그리고 대만이 제조업 분업 체제를 가동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정경 분리 원칙이 흔들리고 있다. 중국이 영토분쟁을 문제 삼아 일본에 희토류 수출 중단 카드를 내보이고, 일본이 한국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트집잡아 한·일 통화스와프를 축소하는 카드를 들고나온 게 대표적이다. 매서워진 반일 정서 탓에 일본의 대중국 투자도 주춤하다. 동아시아 국가 분업 구조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각국의 기술 격차가 줄어들면서 주력 산업이 비슷해지고 있어서다. 협력 구도가 경쟁 구도로 변화하면서 한·중·일이 생존을 걸고 승부를 겨루는 분야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일본의 아베노믹스는 자국 산업 위기에 대한 처방이다. 돈을 풀어 엔저 현상을 유도하고, 다국 간 자유무역협정(FTA)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체결을 추진한다. 일본으로선 경쟁력을 회복하는 게 급선무다. ‘아베노믹스의 스승’이라는 하마다 고이치(濱田宏一) 미 예일대 명예교수조차 숨기지 않는 타깃이 하필 이웃 나라 한국이다.

만무근린(萬無近隣). 철저하게 ‘이웃이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한다는 뜻이다. 한·일 관계를 연구해온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이 왜구의 특성에 관해 주장한 말이다. 이웃 나라와 친하게 지내는 게 그리 어려운가. 아베 신조 내각에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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